해마다 새해가 되면 시간을 거슬러 유년의 잊지 못할 추억의 편린(片鱗)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설빔을 하고 부모님 손에 이끌려 시끌벅적한 시골 장터를 지나가면 공터에 임시로 들어선 대형 천막 건물이 나온다.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입장표를 확인하면 천막 휘장을 열어주는데 천막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그토록 고대하던 흥미로운 신천지가 펼쳐진다.
안산 대부도 방조제를 지나 읍내 쪽으로 들어가던 중 도로 좌측으로 대형 천막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동춘서커스 상설공연장′이라고 적힌 간판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60년 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그때는 마을에 서커스단이 들어오면 동네 전체가 잔치 분위기로 술렁거렸다. 피에로 복장을 한 난쟁이와 원숭이, 짙은 화장을 한 곡예사들이 트럼펫과 북소리에 맞춰 거리를 누비면 동네 조무래기들도 따라가면서 율동에 맞추어 춤추고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볼거리가 귀하던 시절에 서커스는 환상의 종합예술이었다. 그 시절 서커스단은 곡마단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이 무대에서 벌이는 마술, 동물 곡예, 노래, 신파조의 연극은 삶에 지친 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황홀한 선물이었다. 지상 곡예는 아슬아슬하고 하이라이트인 공중곡예는 짜릿한 전율로 다가왔다. 외줄과 그네를 타는 소녀는 연민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때로는 실수를 하지만 오뚝이처럼 바로 일어나 맡은 역할을 계속하는 모습은 우리네 인생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가족들과 손을 흔들며 대형 천막 속으로 사라지는 친구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동네 형들 몇몇이 겁도 없이 천막과 천막이 겹치는 곳으로 몰래 들어가려다 험상궂게 생긴 경비에게 끌려 나와 엎드려뻗쳐하고 있는 모습에 박장대소했던 그 시절의 자화상들.
그런데 서커스에 대해 좋은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곡마단 어른들이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밥 짓고 빨래하고 물 길어 나르게 하면서 밥 대신 식초를 먹이고 힘든 곡예훈련을 시킨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말썽부리는 아이들에게 ″서커스단에 잡아가라고 할 테다.″라며 늘상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곡마단은 비극의 공연장이요 유형자의 유배지처럼 다가오게 되고, 결국 어린 시절 감동과 상처를 동시에 준 나의 문화유산은 자연스럽게 내 뇌리에서도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읽은 소설 하나가 사라졌던 어린 시절 서커스의 추억을 다시 끄집어낸다.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를 겪던 시기에 유랑민들 집단인 곡마단의 생태를 연민과 애정의 마음으로 묘사한 소설, 한수산의 ′부초(浮草)′를 읽고부터다. 제목처럼 떠다니는 풀과도 같은 ′일월 곡예단′ 단원들의 가난한 삶과 동지애와 사랑을 소박하고 솔직하면서도 재미있게 묘사한 이 책을 밤을 꼬박 새어가며 읽었다. 산업화 사회에서 TV와 영화에 밀려 서커스도 불황에 빠진 시대, 소외된 집단의 삶을 동병상련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애조(哀調)가 깊게 드리워져 있는 이 소설은 시대의 풍파에 자연스레 스러져가는 소외계층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

동춘서커스의 역사는 한국 서커스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춘서커스단은 1925년 일본인 서커스단 직원이었던 동춘 박동수 씨가 창단한 대한민국 최초의 서커스단이다. 남성남, 남철, 서영춘, 백금녀, 이봉조, 장항선, 배삼룡, 이주일 등 쟁쟁한 스타들을 배출한 등용문 역할도 했다. 당시 호황을 누리던 서커스단은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산업의 성장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다. 서커스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자 부초처럼 떠돌던 곡예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약장수를 따라다니며 묘기를 부리거나 밤무대 등 ′천막 밖의 삶′을 찾아 떠나 버린 것이다.
2년 전 겨울, 잠실경기장에서 본 ′태양의 서커스′의 상상한 초월한 무대 연출에 크게 감동했던 집사람은 ′천막 안의 시골 서커스′는 눈에 차지 않는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공연장으로 들어선다. 경기도 안산 대부도 해변에 마련된 상설공연장 주변은 황량하다. 대형 천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적막이 감돈다. 평일인지라 안락한 극장식 좌석은 반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펠리니의 영화 <길>에 나오는 늙은 곡예사 잠파노의 눈물과 그의 조수 젤소미나의 슬픈 미소를 기대하면서 공연에 집중한다.

무대 조명이 켜지자 남자 곡예사 여덟 명이 나와 긴 수직 철봉 두 개에 달라붙어 묘기를 선보인다. 8m 높이 기둥에서 몸의 탄력만으로 상하 이동하면서 팔심과 다리 힘으로 수평을 유지하면서 떨어질 듯 제스처를 취할 때는 순간 아찔한 스릴을 느낀다. 휘트니 휴스턴의 ′I Have Nothing′이 나오면서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여성 곡예사가 몸에 감은 천을 휘리릭 풀면서 추락하는 장면에서는 잠시 호흡이 멈추어졌고, 객석에서는 박수와 환호성이 터진다. 공과 모자 저글링, 길게 늘어뜨린 두 개의 붉은 천을 잡고 남녀가 펼치는 환상의 고공 춤, 두 발로 무거운 도자기 독 굴리기, 얼굴 마스크와 의상이 한꺼번에 바뀌는 변검(變臉), 5명이 의자에 올라 물구나무서기 등 1시간 30분 정도 공연이 이어지면서 16개의 수준 높은 묘기를 연출한다.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이미지 변신과 예술성과의 융합, 무대 시설과 조명, 배경음악도 수준급이다.

그런데 필자가 몇 년 전 중국 상하이에서 보았던 중국 서커스와 연기 종목, 복장, 동작 등이 너무 흡사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직원 45명 가운데 25명이 중국인이다 보니 전체적인 공연 분위기도 중국풍으로 흐르는 모양이다.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도 곡예사 30명 중 25명이 중국인이라고 한다. 극한직업이기 때문에 배우려는 사람이 드물어 한국인 단원이 감소하고 있다 보니 중국인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동춘서커스가 없어지면 공연 단체 하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서커스라는 장르 하나가 우리나라 문화예술에서 사라지는 현실보다는 낫지 않은가. 제일 먼저 생겨서 100년 동안 한 세기를 버티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동춘서커스가 한편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 아침 서커스 공연장을 찾은 나이 든 사람들은 무대 위 곡예사들의 몸짓에 환호하고 손뼉을 친다. 보다 세련되고 진화된 연기를 보면서 옛 서커스에 대한 향수를 찾고자 하지만 둘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결국 인정하고 만다. 과거와 현실, 좁혀지지 않는 두 기둥 사이에 걸린 외줄을 타는 젊은 곡예사의 모습에서 아련한 향수도, 애틋한 추억도 묻어나지 않는다.
울어봐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어릿광대의 서글픈 사랑
공굴리며 좋아했지
노래하면 즐거웠지
흰 분칠에 빨간 코로 사랑 얘기 들려줬지
박경애가 부른 ′곡예사의 첫사랑′은 곡마단 트럼펫과 큰 북 장단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에서 가수는 볼륨 넘치는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소녀 곡예사의 슬픔과 쓸쓸함을 노래한다.
곡마단의 그 애잔한 쓸쓸함을 느껴보는 것도 이제 어려울 듯하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