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산 칼럼] 칡과 등나무의 싸움

가재산

몇 해 전 내가 활동하는 한 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천리포 수목원에 나들이를 겸한 여행을 갔다. 이 수목원은 주한 미군 출신이었던 민병갈(1921~2002, Carl Ferris Miller) 박사가 한국에 귀화하여 1962년부터 평생을 바쳐 20만 평의 땅에 아름다운 수목원을 만들어 가꾸어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 수목원은 그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2002년 민 원장이 81세로 별세한 후 천리포 수목원은 재단법인이 되었고 정부가 공익목적의 수목원으로 지정하여 공개했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있던 보물상자의 뚜껑이 열린 것처럼 국제 수목학회로부터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 최초로 세계에서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받았다. 우리나라의 자생식물은 물론 전 세계 60여 개 국가에서 들어온 도입종까지 1만 6천여 식물종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최다 수목원이다. 

 

입구에서부터 미리 예약한 숲 해설가의 인솔하에 수목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우리나라 각 지역은 물론 세계 도처에서 들여온 희귀한 나무와 식물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마다 학술적 분류나 자세한 설명이 붙은 팻말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진 스토리, 나무나 꽃 이름이 지어진 사연들까지 곁들여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팻말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민병갈 원장의 수목에 대한 사랑과 숨결을 전해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숲해설가는 다른 지역에서 여교사로 정년퇴직 후 고향에 봉사하기 위해 낙향한 이 지역 출신의 자원봉사자였다. 귀티가 나는 인상에 얼굴에서도 자상함이 묻어나왔다. 시간의 지혜가 담긴 오래된 책처럼 깊이 있는 설명이 이어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칡과 등나무로 엉켜있는 큰 소나무 앞에 모이도록 한 후 안내자의 진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여러분! 갈등의 어원이 무언지 아시지요?"

 

갑자기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에 다들 시선이 모아졌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잔잔한 관람의 흐름이 잠시 깨졌다.

 

"바로 저 나무들을 보고하는 말입니다. 큰 소나무를 보세요. 좌측에서는 칡넝쿨이 치렁치렁 옆의 나무를 감고 있고, 우측에서는 등나무가 옆 나무 팔목을 조이듯이 감고 있는 거 보이세요?"

 

처음에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칡과 등나무가 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를 두고 마치 운명의 줄다리기를 하듯 용호상박의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소나무는 밑에서부터 나무 꼭대기까지 완전히 에워 쌓여 제대로 크지 못한 채 나뭇가지들이 거의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칡과 등나무는 아랑곳없이 싸움을 계속하며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갈등(葛藤)이란 글자 그대로 칡 갈(葛)에, 등나무 등(藤)를 써서 '갈등'이었다. 갈등이라는 단어가 생긴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현장이었다. 덩굴식물은 다른 물체를 감아올라가며 감는 방향이 저마다 다르다. 시계가 도는 방향으로 감는 것을 오른쪽감기, 그 반대 현상을 왼쪽감기라 한다. 등나무, 인동덩굴, 박주가리 등은 왼쪽감기를 하고 칡이나 나팔꽃 등은 오른쪽감기를 한다. 

 

오른쪽 감기를 하는 칡은 자신이 감고 도는 나무를 햇빛 부족으로 죽게 하고, 등나무는 자신이 기어 올라간 나무를 목 졸라 죽인다고 한다. 좌등우갈(左藤右葛)이란 말처럼 이들이 감고 올라가는 방향이 서로 달라 한 곳에서 만나면 싸우게 된다. 만일 이들 덩굴줄기를 풀어서 반대로 감아 놓아도 새로 자라나는 덩굴줄기의 끝은 원래의 제 방향을 찾아간다. 서로 정반대 감기를 하는 칡과 등나무가 만나면 싸울 수밖에 없다.

 

어느 곳을 막론하고 크고 작은 갈등이 없는 곳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갈등은 노사갈등을 비롯해 지역갈등, 이념갈등이 늘 존재한다. 양극화에서 나타나는 각종 갈등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회사 내 조직에서는 세대 간 갈등이 있고, 가까운 가족, 친구, 고부간에도 갈등이 존재한다. 더구나 최근에는 여의도나 광화문 거리에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 진영으로 나뉘어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점점 크게 내고 있는 대립은 사회를 불안하게까지 하고 있다.

 

그렇다고 갈등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회갈등이 제대로 관리만 된다면 다양성을 흡수하여 역동적인 발전의 새로운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극단을 수용하는 유전인자가 있다. 극단의 '넘나듦'에 의해서 극단적인 요소들을 밀어내지 않고 흡수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질이다. 

 

말하자면 한국인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들을 끌어안아서 손쉽게 넘나들기도 한다. 집안에는 대청, 동네에는 마당, 도시에는 광장 같은 중간지대를 설정해서 완화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2002년 월드컵이나 태안의 기름 유출 사고, 그리고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K방역에서 보여주었듯이 '우리'라는 공감의 마음만 생기면 하나로 똘똘 뭉치는 ‘한마음의 나라’다.

 

그렇다면 갈등을 줄이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여는 데서 시작했으면 좋겠다. 마치 겨울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대문, 창문, 자동차문 등 사람이 드나드는 많은 문이 있다. 이러한 문들은 남이 밖에서 열 수 있도록 손잡이나 문고리가 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은 문고리가 없어 자신만이 열 수 있다. 틀리다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 필요하다.

 

천리포 수목원에서는 올해도 지역·계층 사이의 갈등을 풀어내는 마음의 치유와 힐링 프로그램이 운영된다고 한다. 이곳을 한 해 2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다는데 칡과 등나무의 싸움 현장은 우리 사회의 거울과도 같다. 수목원에 칡과 등나무에 얽혀 힘들게 서 있는 소나무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재산]

한류경영연구원 원장

한국디지털문인협회 부회장

미얀마 빛과 나눔 장학협회 회장

저서 : 『한국형 팀제』, 『삼성이 강한 진짜 이유』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아름다운 뒤태』

이메일 jska032852@gmail.com

 

작성 2025.01.16 10:17 수정 2025.01.1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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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