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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 서정주, <자화상> 부분
서정주 시인의 아버지는 ‘종’이었다. 아버지가 종이니 시인은 당연히 종의 자식이 된다. 그래서 중국의 임제 선사는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왜? 그들이 우리 머리 위에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세계다. 인간은 각자 독립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삶을 꾸려가야 한다. 어떤 존재도 우리의 삶을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서정주 시인이 애비가 종이라고 규정을 내리니, 자신의 삶은 지리멸렬해진다. 뛰어난 시인이 친일파 시인의 삶을 살았다는 게 안타깝다.
신화, 민담에는 영웅의 여정이 나온다. 다들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가부장 사회의 ‘정체성 찾기’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民主主義) 시대다. 모든 민(民)이 주(主)가 되어야 하는 시대다.
서정주 시인의 외할아버지는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했다. 갑오년의 동학혁명 때 실종되었나 보다. 그 외할아버지를 왜 닮아가지 않았을까? 그의 삶은 새롭게 구성되었을 텐데.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