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7년 4월 백의종군 길에 오른 충무공 이순신은 6월 4일 도원수 권율이 주둔하고 있는 경상도 초계군(지금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에 이르렀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6월 5~6일 유숙할 방을 도배하였는데, 아마도 오랜 기간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머물 방을 도배하였으므로 충무공은 6일 저녁 숙박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어떤 집을 들어갔는데, 마침 그 집은 과부의 집이었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6월 6일
맑았다. 유숙하는 방을 다시 도배하고 군관이 (머물) 헐청 2칸을 지었다. 늦게 모여곡 주인집의 이웃에 사는 윤감, 문익신이 와서 만났다. 종 경을 이대백에게 보냈더니 “색리가 다른 곳으로 나가서 받아오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대백도 와서 만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어두워질 무렵 집으로 들어갔는데, 과부가 (사는 집이라) 다른 집으로 옮겼다.
[원문] 晴. 宿房改塗 造軍官歇㕔二間. 晩毛汝谷主家隣居尹鑑文益新來見. 京奴送于李大伯處 則色吏出他 未得受來云 大伯亦欲來見云. 昏入家寡婦移他家.
* 헐청: 휴식을 취하기 위한 건물
위 기록의 원문 ‘昏入家寡婦移他家’를 대부분의 『난중일기』 번역서들은 ‘어두워질 무렵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 과부는 다른 집으로 옮겨갔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즉, 원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에서 이 문장을 찾아보면 원문이 ‘主家乃寡婦家卽移他家’로 조금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원문은 '주인집이 과부의 집이었으므로 곧 다른 집으로 옮겼다.'라는 의미이다.
어떤 『난중일기』 번역서는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원문이 오류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비록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가 수정 또는 삭제된 내용이 적지 않고 종종 오류가 보이기도 하지만, 이 문장은 오류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어려운 한자나 복잡한 내용이 없으므로 실수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충무공전서』의 간행을 감독한 규장각 출신 학자 유득공(柳得恭, 1786~1787년)과 윤행임(尹行恁, 1762~1801년)의 학식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이렇게 문장을 바꾸어 쓴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독자들께서는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라는 문장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장의 띄어쓰기가 잘못되어 그 의미가 이상해진 점을 어렵지 않게 파악한다. 사람들이 이 문장의 문제점을 쉽게 파악하는 이유는 문장의 의미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위 기록의 『난중일기』의 ‘昏入家寡婦移他家’ 또한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어두워질 무렵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 과부는 다른 집으로 옮겨 갔다.’라고 번역하면, 의미상으로 두 가지 논리적인 문제점이 생긴다. 첫째는 이 문장이 '손님이 집주인 대신 그 집에서 숙박하고, 집주인은 다른 집으로 옮겨서 숙박했다.'라는 의미가 되는 문제점이다. 우리나라에는 손님이 주인을 다른 집으로 내보내고 자신이 그 집에서 숙박하는 그런 예의 없는 풍습은 없다. 묵을 방이 없으면 손님이 빈방이 있는 다른 집을 찾아가는 것이 상식적이다. 둘째는 유교 문화를 가진 조선 사회에서는 외간남자가 과부의 집에 머무는 것이 금기시되었다는 문제점이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조선시대는 남녀의 구별이 엄격한 사회이다. 성문화가 개방된 현대 사회에서도 여자만 사는 집에서 갑자기 외간남자가 나오면 소문거리가 될 수 있다. 하물며 조선시대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가 위 문장의 일부 한자까지 바꾸어가며 그 의미를 다듬은 점은, 당시 유교 사회의 인식을 기준으로 하여 이 문장을 해석한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독자들께서 조금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한 가지 기록을 소개하여 드리고자 한다. 『선조실록』의 기사에는 외간남자가 과부의 집에 머무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당시의 풍습을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다. 비록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이를 소개함으로써 이상의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선조실록』 권12, 선조11년(1578년) 3월 4일 을묘 1번째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횡성에 절개를 지키는 과부가 있는데, 훈도 이희연이 첩으로 삼으려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 여인이 집에 없기에 그는 그대로 그 집에 들어가 숙박하고는 이미 장가를 갔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 여인이 집으로 돌아와 그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는 의리상 자기 집으로 여길 수 없다고 하고,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르고 의리를 지킬 것을 맹세하였으니 그 절행(節行)은 늠연하여 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횡성현감 김호(金鎬)는 훈도와 함께 한 마음이 되어 여러 가지로 위협해서 수절하는 여인으로 하여금 처소를 잃고 떠돌게 만들었으니, 김호는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고 이희연은 잡아다가 추고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답하기를,
"이것은 바로 절의(節義)에 관계된 일이니 아울러 김호도 잡아다가 추고하라."라고 하였다.

위 기록은 『횡성군읍지』에 수록된 선생안이다. 붉은 네모 안에 쓴인 내용은 횡성현감 김호(金鎬)가 병자년(1576년)에 도임했다가 무인년(1578년)에 붙잡혀갔다(拿去)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위 『선조실록』의 기사에서 언급된 횡성현감 처벌이 실제로 실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횡성군읍지(橫城郡邑誌)』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