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우리시대 식민주의와 싸우는 법

이진서

새해를 며칠 앞두고 나는 한 통의 메일에 내내 시선이 쏠려있었다. 미국에서 날아온 코스미안뉴스 이태상 회장의 칼럼이었다. 오랜 연륜이 묻어나는 그의 글에서 어슴푸레 시대정신이 느껴졌다. 재진술(再陳述), 어휘 변용(語彙變容), 영어로는 paraphrasing. 그런데 문제는 각자의 인생도, 세상사도 재진술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격동하는 당대를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나는 최근 부산연구원 학연 과제의 하나로, 부산지역의 임진왜란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당시의 부산포를 들여다보는 일은 상상외로 고된 작업이었다. 특정한 시기 지역의 역사가 향토사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지역사는 암흑 속에 묻혀있다. 

 

임란처럼 국가적 차원의 재난을 겪은 시기는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고 국가재건 과정에서 새로이 기술되는 역사는 대개 통치자들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기에 그것의 사실 여부 자체를 가려야 하는 경우도 많다. 정사인 선조실록이나 이후 고쳐 쓴 선조수정실록 못지않게 임란 당시의 전쟁 기록인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순신은 1591년 2월(이하 음력)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다음 해 1592년 정월 초하루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임란 발발 넉 달 전부터 이미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혹 있을지도 모를 왜의 대규모 침략을 우려했던 이가 비단 이순신뿐이었을까. 임란 당시의 부산 향토사를 정리하면서, 당시 순국한 부산진성의 정발 첨사와 동래성 송상현 부사, 다대진성의 윤흥신첨사를 재진술(再陳述)할 필요를 절감했다. 

 

임진년 4월13일 부산포 앞바다를 통해 쳐들어온 왜의 1진 18,700명을 모두 합쳐봐야 고작 1,000명의 부산진성 병사와 백성들이 몸을 던져 막았다. 그리고 연이어 동래성과 다대진성에서 장수들과 병졸들, 성안의 백성들은 거의 도륙당하다시피 했다. 나는 임진년 4월의 참상을 통해 참담하지만 이들의 존엄한 죽음과 그것을 가능케한 당시 부산포사람들의 의기가 여전히 부산정신으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이때부터였을까. 이후에도 순탄치 않았던 한일 관계와, 결정적으론 36년간의 식민지 경험은 우리민족에게 특별한 사고방식을 형성하게 했다. 한국전쟁으로 분단 상황이 굳어지면서 이 징후는 더욱 뚜렷해졌다. 남북을 막론하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식민주의의 망령과 싸워야만 했다. 나는 한국 사회가 겪는 난맥상은 거의 예외없이 이것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의 뿌리는 여전히 깊고 넓어 보인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수용되고 논의되는 탈식민주의는 이미 상당 부분 식민주의에 포섭되어 있다. 외세에 의한 지배와 침탈의 과정이었든, 그것이 나라 안 통치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든 이러한 사실을 기술(記述)하는 일은 그래서 쉽지 않다. 매우 복잡한 '융합'의 과정을 거쳐 우리 몸의 한 부분으로 체화되어 버린 탓이다. 서발턴의 목소리? 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의 역사에선 그것이 가능할 수 없었다. 기득권의 언어를 대체한 서발턴 스스로의 기록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한 사람의 사적인 기록이 당대의 공적 기록이 되는 과정을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식민(植民)의 언어, 분열의 언어는 어느 시대나 만연했다. 그것이 비단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 공동체의 발목을 잡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제 뿌리 깊은 식민주의의 잔재들이 기록하는 자의 손끝에서, 어휘 변용(語彙變容)을 통해 민낯이 드러나길 바란다. 모두가 목격자이자 기록자이길 권한다. 제2의 난중일기가 쓰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 식민주의와 싸우는 가장 위력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lsblyb@naver.com

 

작성 2025.01.28 10:30 수정 2025.01.2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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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