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설날 아침에 거울을 보며

이순영

설날이 오면 살날을 헤아려보는 나이가 되었다. 설날이 설레는 어린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좋은 나라인데 설렘이 지루함으로 바뀌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도 설날은 노는 날이 많아 좋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새로운 시작, 그 시작의 첫 단추를 끼우면서 올 설날에도 건강과 행복을 의례적으로 기원해 본다. 그립던 어릴 적 설날은 아니지만 여전히 설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매해 같다. 핵가족 시대 설날 풍경도 가지각색이다. 

 

요즘은 각자도생으로 설날을 쇠는 게 다반사다. 오히려 명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부럽게 느껴진다. 이쯤 되면 설날은 달력 속의 빨간 글씨로 적힌 노는 날, 여행 가는 날쯤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좀 서글퍼지기도 한다. 

 

갑자기 몇 오라기 수염 더 돋았으나

6척의 몸은 도무지 자라지 않네

거울 속 얼굴은 해마다 달라도

철부지 같은 마음은 지난해 그대로네


삼백여 년 전 조선의 천재 연암 박지원도 설날에 문득 거울을 보고 팍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설날 아침에 거울을 보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거울 속의 모습은 해마다 달라져 있지만 어릴 때 그 마음은 그대로라도 스스로 위안 삼는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 법인가 보다. 어릴 적 그 마음이 몸처럼 늙어버린다면 아마 인생은 참 재미없었을 것이다. 늙지 않는 철부지 마음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다. 아무리 수염이 희끗거려도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마음이 있기에 해마다 설날을 맞이해도 덜 서글프다.

 

설날이 되면 생각하게 된다. 습관적으로 관념적으로 ‘나’라는 개체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한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에 시간으로부터 나를 분리하지 못하고 그 시간의 범주에서 마냥 반항하며 투덜댄다. 그래서 설날은 새로움에 대한 각오이자 시간에 대한 반항이다. 반항해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반항하는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연암처럼 철부지 같은 마음을 들여다보며 지난해처럼 그대로인 것을 ‘마음’의 불가결한 본질을 성찰해 본다. 

 

조선 후기 노론이 득세할 시기에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난 박지원은 그야말로 금수저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니, 그의 인생은 정해져 있었다. 과거시험을 보고 고위 공무원이 되어 가문을 빛내고 출세 가도를 달리며 이름을 떨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연암은 그 궤도를 벗어나 버렸다. 과거 시험장에서 시험지를 내지 않고 나오거나 이상한 그림을 그려 놓고 나오며 이상한 반항을 했다.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한 연암의 장인은 사위를 이해했다. 연암의 장인이면서 스승인 그가 연암의 사람됨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 독특한 천재를 이해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연암은 서민들이 많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많은 타짜를 만났다. 이야기꾼이며 거간꾼이며 똥장사며 항아리장사 등 남들이 업신여기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글로 옮겼다. 그들의 친구가 된 연암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책을 보고 유람하며 진심으로 그들의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연암의 가슴은 점점 넓고 깊어만 갔다. 그들과 함께하며 삶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직접 체험했다. 연암은 술 마시면서 풍류를 읊는다는 건 다 핑곗거리에 불과하며 술에 취하면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다 개가 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연암은 내놓으라 하는 명문가 사람들과도 교류를 많이 했다. 홍대용, 유언호, 이서구 등 노론 출신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뿐만 아니라 열하 여행을 함께 했던 장복이와 창대 그리고 오복이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인간관계의 높고 낮음을 두지 않고 두루두루 어울려 진정한 인간애를 실현한 연암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것을 계급사회인 조선에서 실현한 것은 연암 아니고는 어림없는 일이다. 야인으로만 떠돌던 연암은 가장 노릇을 위해 과거시험을 보고 합격해 공무원이 된다. 

 

실학자이자 문장가며 정치가인 연암은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어디 그뿐이랴. 철학과 경세학, 천문학 농사 등 그의 학문은 너무 광범위해서 조선 같은 치졸한 나라에서 그의 그릇이 쓰임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하다하다 탐정 노릇까지 했는데 1792년에 안의 현감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중에 대구에 도착하게 된다. 대구 경상감사가 살인사건 4건을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4건 모두 사람이 죽었지만, 수사를 해보니 너무 황당하고 의심스러워 구속하지 못하고 최고 행정관청으로 올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연암은 이 4개의 사건을 명석한 두뇌로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연암은 건륭제의 70번째 생일을 맞아 북경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긴 여행을 하게 된다. 700리를 걸어 무박나흘의 강행군을 했다. 굶주리고 잠은 쏟아지고 발은 아프고 세상 힘든 여행 끝에 선진국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에 잠겼을까.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이 가여워 말없이 울었을 것이다. 청나라의 뛰어난 문물을 조선으로 가져와 넓게 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괴로웠을 것이다. 조선의 천재 연암 박지원이 우리에게 확실한 한 가지를 알려주었다. 

 

“머리 좋고 가문 좋은 사람이 꼭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변방으로 떠도는 삶이 반드시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설날이 되면 연암 박지원이 생각난다. 설날에 관한 시가 부지기수이지만 설날과 연암은 그닥 어울리지 않지만 이제 세월과 함께 시간 위를 건너다보니 설날에 연암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거울 속 얼굴이 해마다 달라지는 나도 어린 시절 마음이 그대로 인지 자꾸 내가 나에게 물어본다. 그러면 연암이 대답한다.

 

거울 속 얼굴은 해마다 달라도

철부지 같은 마음은 지난해 그대로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5.01.30 09:59 수정 2025.01.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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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