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은 인간이라는 생체기계를 잘 굴러가게 하는 휘발유 같은 것이다. 욕망이 없으면 생체기계가 굴러갈 수 있을까. 욕망은 희망만큼이나 절대적인 정신적 에너지다. 그러므로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를 지녔다. 그런 욕망을 정복하거나 아예 없애 버리려고 노력하는 집단이 바로 종교다. 특히 불교는 욕망을 경계 대상으로 삼아 죄악시하고 다양한 방면으로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욕망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부르는 용어들을 보면 갈애, 탐욕, 애욕, 의욕 등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오죽하면 깨달음은 욕망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했을까.
그런 욕망으로부터 출발하는 영화가 ‘삼사라’다. ‘삼사라’는 친근하지 않은 단어다.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단어다. 이질적이면서도 내적 친근함이 함의된 ‘삼사라’는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찾아보는 영화 제목이다. ‘삼사라’는 불교의 윤회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녔다. 생과 죽음의 순환을 뜻하는 ‘옮겨지다’ 혹은 ‘다시 태어난다’로 방황, 흐름, 순환, 변화, 반복, 탄생, 죽음 등 재탄생의 순환적 개념을 지녔다. 아시아에서 부르는 윤회의 개념보다 히말라야 중심의 티베트에서 윤회의 대체 개념으로 부르는 것이 ‘삼사라’다. 영화 ‘삼사라’는 티베트 사람들의 인생관이 드러나 있는 영화다.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은 영화 ‘삼사라’를 굳이 찾아보았다. 조금 낯선 주제, 화면 가득 차 있는 종교색, 인간적인 고뇌와 인간 너머의 어떤 세계가 영화에 몰입하게 했다. 세련된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의 의도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 영화다. ‘삼사라’를 만든 감독은 ‘판 나린’이다. 인도 아다탈라 오지에서 태어나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아홉 살에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십대에 마을을 떠나 인도와 프랑스에서 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했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공부는 학교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것을 깨닫고 정처 없이 히말라야를 유랑 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애욕과 관능, 신앙, 종교 등 정신세계를 다양하고 다루고 있다. 판 나린 감독을 이해하고 나니 ‘삼사라’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2002년에 개봉한 ‘삼사라’는 138분의 상영시간에 티베트어로 되어 있다. 남자 주인공 ‘타쉬’는 숀쿠라는 배우가 맡았다. 숀쿠라는 배우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냥 훈남처럼 생긴 동양인이라는 것이 전부다. 여자 주인공 ‘페마’는 종려시가 연기했는데 캐나다 출신의 홍콩계 배우다. 몬트리올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미인 대회에서 미스 몬트리올 대표로 출전해 미스 차이니즈로 선발되면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종려시는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티베트 영화에 출연해도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드는 배우다. 우리나라 김혜수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삼사라’는 심오한 내용과는 달리 줄거리는 간결하다.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불교에 귀의한 타쉬는 훌륭한 수도승이 되기 위해 3년 3개월 3일간 고된 수행을 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수행을 마친 타쉬는 그 어려운 수행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인지 수행 중에도 없던 강한 성욕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안고 마을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 페마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만다. 수행자로 살 것인가 속세로 나가 세상을 경험할 것인가를 놓고 고뇌하던 타쉬는 결국 속세로 나가는 길을 택하고 절을 떠나고 만다. 아름다운 페마는 자신을 사랑한다며 수행에 정진하던 절을 떠나온 타쉬가 당황스럽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타쉬를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페마는 농부의 딸로 정숙하고 예의 바르며 보기 드문 미인인 데다가 결혼을 약속한 남자도 있었다. 남녀의 사랑이 그렇듯 타쉬와 페마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결국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 카르마를 낳는다. 페마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남편인 타쉬를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하지만, 그녀의 슬픔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작은 마을에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질투와 슬픔, 유혹과 시련, 부조리와 외압 등 갈등과 고통이 서로 뒤엉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세속적인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타쉬는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우리 내면에도 ‘타쉬’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 현실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에이 머리나 깎을까 보다’라며 자조하기도 한다. 또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동경하며 걸핏하면 오지로 떠날 궁리를 한다.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절이라는 탈출구를 택한 타쉬는 부처의 일대기와 비슷하다.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내면은 심오하면서 심플하다. 판 나린 감독은 ‘존재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영향이 다른 존재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결국 인생에서의 해프닝은 욕망과 운명의 결과인 업이며 욕망 역시 현실과 삶으로 삼사라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우린 늘 갈등하고 질투하고 또 화해하고 정진하고를 반복한다. 그게 삶이라는 걸 안다. 무지를 깨닫기도 하고 지혜를 터득하고 한다. 화나면 본성대로 살다가도 이성으로 꽤 진지하게 살기도 한다. 근데 다 그렇게 살지 않던가. 삶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인생 뭐 있어 하면서 자조하다가도 그래 인생 뭐 있을 거야 하면서 위로하기도 한다. ‘삼사라’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생각이 많아진다. 뭘 해야 할 것 같은 조급증에 시달린다. 깨달음이라는 거창한 것보다 그냥 저 밑바닥에 있던 무언지 모를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타쉬가 다시 출가를 결심하고 절로 돌아가는 길에 돌에 새겨진 글을 보게 되는데 마치 그 글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