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부터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자는 주장이 있어 왔다. 현재도 진행 중이다. 수필에 허구를 수용해도 문제가 없는 걸까?
생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존중해야 하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현재 수필의 정의를 고려해 볼 때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는 순간, 수필의 본령과는 거리가 멀다. 만일 수필로 발표하더라도 그건 수필의 탈을 쓴 허구일 뿐이다. 분량을 고려할 때 장편소설(掌篇小說) 혹은 단편 동화 같은 허구에 불과하다.
‘수필’이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뉘는데,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 있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문학에서 ‘허구’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소설이나 희곡 따위에서,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 냄. 또는 그런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위의 ‘수필’과 ‘허구’의 정의만으로 판단해 봐도,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자는 주장은 수필의 본질을 소설과 희곡처럼 허구로 바꾸자는 말이다. 즉,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하자는 주장이다. 수필 갈래의 개념을 기형화하자는 말과 상통한다.
수필가의 일부이긴 하나 수필의 본질과 동떨어진 허구에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면, 남의 밥그릇에 관심이 더 많은 듯하다. 허구 작품을 창작하고 싶으면 수필가를 그만두고 허구 문학의 작가로 변신하든지, 그냥 허구 문학 작품을 창작하고 발표하면 될 일이다. 왜 멀쩡한 수필에 허구라는 달갑지 않은 재를 뿌려 대는지 궁금하다.
진정, 허구가 무엇인지 알고 주장하는 걸까? 아니면 수필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주장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 모든 수필가가 허구 수용을 동의했다고 가정해 보더라도, 수필에 제대로 허구를 창조해낼 수 있을까? 소설의 껍데기만을 더듬는 것은 아닐까? 콩트인지 수필인지 분간은 할 수 있을까? 한 번쯤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수필에 허구 수용이 불가한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수필은 문학이면서도 문학의 속성인 허구를 배제한다는 본질이 확고부동하다. 문학 갈래의 용어는 가변성의 개념이 아니다. 불변성의 개념이다. 진리는 변할 수 있지만, 개념어는 변하지 않는 진실처럼 거의 불변성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충돌 이후 ‘지동설’이 정설로 굳어졌지만, ‘천동설’의 개념의 본질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어떤 개념어가 진리 측면에서 많은 모순점을 안고 있어 정설과 통설에서 거리가 멀어지더라도 그 개념어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철학 용어 ‘이데아(idea)’를 비롯한 대부분의 개념어가 한 번 정립된 이후 수십 세기가 지나더라도 변함없이 불변성을 유지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용어의 개념을 보충하는 개념어가 탄생하기도 하고, 용어의 모순을 비판하는 개념어가 탄생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개념어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한국문학의 갈래 가운데 하나만 예를 들면, ‘신체시’의 창작 행위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개념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다. 개념의 본질만큼은 지금까지 이어지듯, 문학 갈래의 용어는 개념어라서 그 갈래가 사라지더라도 거의 불변성을 유지한다. 물론 후대에서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개념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정립된 수필의 정의와 개념이 현재까지 변하지도 않았고, 적어도 향후 몇 세기 동안은 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둘째, 의무교육을 이수한 독자라면 대부분 픽션(fiction)과 논픽션(nonfiction)을 구분할 줄 알고, 분별할 줄 안다. 수필을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과 사실을 바탕으로 쓴 산문의 글이라 믿으며 읽는다. 독자들은 수필의 사전적 의미를 중학교 과정에서 이미 배웠고, 시험을 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독자가 수필은 허구가 아님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인다.
셋째, 대부분 수필가가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허구를 조금이라도 수용한 수필, 즉 ‘허구 수필’은 정통적인 수필의 갈래에 속할 수 없다고 인식한다. 이 세 가지만으로도 결론은 명확하다. 수필에 허구 수용은 불가하다.
허구 ‘수용론자’들은 신변잡기로 전락한 수필의 모순을 타파하고, 문학적 완성도를 이루기 위해 허구 수용을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 시험 정신만은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허구 수용 그 자체가 문학 갈래의 개념과 본질을 벗어나 내부적 모순을 안고 출발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혁과 변혁은 제도의 틀을 깨부수는 것이지 문학 갈래에 적용할 문제는 아니다.
허구 ‘수용론자’들은 오늘날 수필 작품의 질적 저하의 원인을 수필 갈래에서 찾다 보니 얼토당토않게 허구를 내세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함량 미달의 수필 작품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유는 함량 미달의 수필가를 그만큼 많이 배출하였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함량 미달의 수필가를 양성한 수필단 내부의 제도적 모순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파벌주의와 상업주의가 만연한 수필단 내부에 산재한 모순부터 타파하고 개혁해야 할 문제이다. 아무런 죄 없는 수필 갈래에서 모순 아닌 모순을 찾다 보니 스스로 모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간이식 수술이 시급한 응급환자에게 멀쩡한 신장이식 수술을 하려는 행위와 다름없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가야대학교 강사.
저서 : 평론집 7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5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