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의 용모에 대한 기록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고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 그의 속에는 담력과 용기가 있어 보였다.”
한편 이순신과 동시대 인물인 고상안은 그의 문집 태촌집에서 이순신의 용모에 대해 류성룡과는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겼다.
“이순신은 말솜씨와 지모는 뛰어났지만 용모가 풍후하지 못하고, 인상도 입술이 뒤집어진 상이라 복장(福將)은 못 되는 것 같았다.”
1576년에 이순신과 고상안은 각각 무과와 문과에 급제했다. 비록 문무는 달리했지만 이들은 요즘 말로 하면 고시 동기생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을 방목(榜目)이라 하는데 여기에 함께 이름이 오른 사람을 동방(同榜)이라고 하며, 이들의 모임을 방회(榜會)라고 한다. 같은 해에 문과와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은 엄격히 말하면 동방은 아니지만 사실상 동방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전국 각지로 흩어져서 근무하던 이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서로 격의 없이 소통하며 우의를 다졌다. 이순신과 고상안도 그런 사이였다.

1594년 한산도에서 무과 별시를 볼 때 이순신은 인근에 있는 고성현감 조응도 등과 함께 삼가현감 고상안을 시험 감독관인 참시관으로 초빙했다. 당시 고상안은 한산도에 약 보름 정도 머물며 이순신의 용모를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1594년 무과별시를 시행할 당시 한산도에는 역병이 돌았고 이순신 자신도 병에 걸려 심하게 앓고 있었다. 원균과의 갈등도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이순신은 당연히 얼굴에 살이 빠지고 입술도 쪼그라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본 고상안은 자신이 본 대로 이순신의 용모를 기술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당상관 중에서도 종2품인 고위 관리였지만, 같은 해에 급제한 삼가현감 고상안은 종6품에 불과한 하급 관리였다. 고상안은 문과 출신이라는 자존심이 있었을 것인데 지위는 이순신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이순신이 고속 승진한 것에 대한 질투심이 일부 작용하여 이순신의 용모를 약간 깎아내렸던 것은 아닌지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