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용 칼럼] 수필은 허구가 아니다 4

수필의 인물과 사건은 진실한 현실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면 팩션(faction)이다. 그 순간, 수필의 본질에서 벗어난다. 개인의 체험적 진실을 바탕으로 한 ‘재생적 상상력’을 수렴한 산문의 글인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여 팩션화했다면, 그건 전기적 장편소설(掌篇小說)이다. 수필의 본령은 팩션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장르이다. 수필은 오롯이 진실의 문학이고, 일기와 같이 체험을 바탕으로 진실을 고백하는 글이다.

 

수필은 체험적 진실의 문학이다. 허구 문학이 아니다. 일부 수필가가 허구를 수용한 문학이라고 주장하면서 수필가를 배출한 관계로 허구를 수용한 수필이 수많이 발표되었다. 즉, 장편소설(掌篇小說)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기형적 글을 생산한 결과를 초래했다. 독자는 이런 허구의 장치를 알지도 못하고 진실로만 받아들인다. 『수필학』(제16집, 한국수필학회, 2008)에서 허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아래와 같이 읽어 본다. 

 

어떤 이는 수필에 허구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건 소설이지 수필이 아니라고까지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지나친 억지라는 걸 알 수 있다. 수필가는 소설가가 즐겨 쓰는 그런 허구를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소설가처럼 그렇게 허구를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수필에는 허구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것은 거짓이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수필가가 거짓말을 쓸 수도 없고 또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도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허구는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문제가 있는 말이다. ‘fact’와 ‘reality’는 엄연히 그 성격이 다르다. 허구가 사실은 아니기는 해도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인용문의 주장은 허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글이다. 요지는 허구 ‘수용 불가론자’의 주장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건 소설이지 수필이 아니라고까지 한다.”와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것은 거짓이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라는 ‘수용 불가론자’, 즉 수필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말자는 측의 주장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대해 “수필가는 소설가가 즐겨 쓰는 그런 허구를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소설가처럼 그렇게 허구를 끌어들이지도 않는다.”와 “‘fact’와 ‘reality’는 엄연히 그 성격이 다르다. 허구가 사실은 아니기는 해도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라고 반박하였다.

 

반박의 글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가. 모순은 없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모순적인 오류의 주장이다.

 

첫 번째 오류는 수필의 정의와 개념을 비롯해 본령 자체가 허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장르의 특징이 보편성임을 전제하지 않고 주장을 펼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다. 수필의 사전적 의미는 제도권 학제에서 이미 오래전 보편화한 개념이고, 학생들은 그렇게 배우고 시험을 칠 때 사전적 의미에 맞게 정답을 고른다. 이처럼 대부분의 독자와 수필가는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마치 그 보편성이 잘못된 것처럼 주장했다.

 

두 번째 오류는 “수필가는 소설가가 즐겨 쓰는 그런 허구를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수필만의 허구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을 펼치는 개념적 오류를 범했다. 소설의 허구와 수필의 허구가 다르다는 말인가? 만일 다르다면, 어떤 면이 다른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논리적 한계가 있다. 허구는 말 그대로 허구이다. 허구라는 것이 소설에 따로 있고, 영화나 드라마, 연극에 따로 존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허구 ‘수용론자’와 ‘부분적 수용론자’의 공통적인 오류는 ‘허구’와 ‘상상력’을 동일시한 표현이다. 만일 그렇다면 소설과 같은 ‘허구적 상상력’인 ‘창조적 상상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닌 듯하고, 아마도 ‘경험적 상상력’인 ‘재생적 상상력’을 주장하려는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재생적 상상력’은 허구와는 거리가 멀다. ‘재생적 상상력’은 ‘지각’과 ‘기억’, 즉 ‘느낌과 체험을 통한 깨달음’과 ‘기억의 재생’에 의존하는 상상력이다. 체험적 현실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 현실성과 사실성에 가장 가까운 상상력이다. 허구와 상상력은 명확히 구분하고 분별해야 한다. 

 

세 번째 오류는 ‘fact’와 ‘reality’에 대한 개념적 오류이다. “‘fact’와 ‘reality’는 엄연히 그 성격이 다르다”는 주장은 맞다. ‘fact’라는 ‘사실’과 ‘reality’라는 ‘사실(현실)’은 다르다. 또한, 그 뒤의 “허구가 사실은 아니기는 해도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만을 분리해서 읽어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앞의 문장과 연결해서 읽어 보면 심각한 오류가 있다. ‘문학의 진실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으로 읽힌다. 또한, ‘reality’를 ‘진실’이라는 용어로 대입한 것 자체가 모순이다. 문학에서의 ‘reality’의 주된 의미는 ‘현실성’과 ‘사실성’이다. 그런데 문학의 ‘진실성’에만 초점을 맞춰 주장을 펼치는 개념적 오류를 범했다.

 

‘reality’란 “실제로 있는 모습 그대로인 것”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사실(fact)’과 ‘진실(truth)’이 있다. 또한, ‘reality’는 ‘사실(fact)’과 ‘진실(truth)’의 의미를 포괄한다. ‘사실(fact)’은 “현실로 있는 일”, 혹은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사물의 존재나 내력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확실하다는 뜻으로 쓴다. ‘진실(truth)’은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따라서 ‘사실(fact)’은 그런 일이 존재했느냐 아니 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진실(truth)’은 그 일이 옳으냐 그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김상태, 「수필의 문학성」, 『수필학』, 제16집, 한국수필학회, 2008, 25쪽 참조.)

 

결국, ‘reality’란 인용문에서 주장한 ‘수필의 진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때로는 문학에서 ‘reality’를 ‘진실’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truth’와는 명확히 다르다. 허구 문학에서의 진실은 ‘truth’가 아니라 ‘reality’가 맞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진실은 ‘reality’와 ‘truth’가 모두 해당한다. ‘느낌’의 진실성은 ‘reality’이고, ‘체험’의 진실성은 ‘truth’이다. 달리 말하면, 수필은 현실성(reality)의 진실(truth)을 추구한다. ‘재생적 상상력’을 동원한 ‘느낌’을 표현한 문장의 진실은 ‘reality’, 개인의 시공간적인 ‘체험’을 표현한 문장의 진실과 ‘체험’한 이야기의 진실은 ‘truth’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리얼리즘(realism)을 ‘사실주의’라고 했다. 번역의 오류에서 발생한 문제임을 이제는 학문적으로 아는 시대이다. ‘현실주의’라는 번역이 합당하다. 그래서 ‘현실’과 ‘사실’을 병행 사용하기도 한다.

 

『수필학』(제16집, 한국수필학회, 2008)에서 허구를 수용하지 말자는 측의 주장을 아래와 같이 읽어 본다.

 

수필의 이야기(story)에서 허구를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담론(이야기를 하는 방법)에서의 상상에 의한 글쓰기가 허구냐 아니냐 라는 논박에 불과하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수필에서 허구를 논할 것이 못 된다. 남은 것은 상상의 글쓰기다. 상상의 글쓰기. 누군가 단수가 아닌 복수의 수필가들이 다양성을 시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인용문의 주장은 ‘수용 불가론자’의 주장을 옹호한다. “수필에서 허구를 논할 것이 못된다.”라고 하면서 “남은 것은 상상의 글쓰기다”며 상상력에 의한 글쓰기의 시도를 권유하고 있다. 인용문은 ‘수용 불가론’임에도 ‘상상력’을 세분화하여 다루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다루고 있다. 그냥 ‘상상의 글쓰기’라고 하면, 주장한 분의 의도와는 달리 자칫 허구를 떠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생적 상상력’에 국한한 ‘상상의 글쓰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수필은 본질 그대로 개인의 체험적 진실을 바탕으로 이상화한 ‘재생적 상상력’을 수렴하여 표현성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소설보다 더한 과장법을 동원한 표현성으로 감동을 안겨 주는 수필도 있다. 과장법을 허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보다 더 미려한 표현성으로 감동을 안겨 주는 수필도 있다. 기교의 문장을 허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허구가 아닌 표현성의 문제이다. 산문정신으로 창작한 진실이 꿈틀거리는 산문의 글인 수필은 수필일 뿐, 소설이나 시처럼 허구 문학일 수는 없다. 소설과 시와는 달리, 수필을 허구성과 현실성(사실성)의 경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창작한다면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수필은 현실과 사실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상화하여 쓰기 때문에 ‘재생적 상상력’을 발휘하더라도 ‘창조적 상상력’까지 발휘하면 곤란하다. 창조적인 문학예술이 아니다. 일기가 자신의 일과를 진솔하게 기록하고 반성하는 글이지 상상력을 수용하여 허구성을 장치하는 글이 아니듯, 수필도 허구성을 장치하는 그 순간, 수필이 아니다. ‘단 한 줄의 허구가 무엇이 잘못이냐?’라는 식으로 합리화시킬 수도 있다. 언제나 단 한 줄이 문제다. 수필은 허구 문학이 아니라 현실성의 진실한 문학이다.

 

허구를 수용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수사법을 동원하여 표현성의 확장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수필의 특성이다. 『수필론산고(隨筆論散考)』(문학수첩, 1994 2판)에서 인용한 글을 아래와 같이 읽어 본다.

 

에세이에는 어떠한 인물이라도 등장하여 새로운 연기를 한다. 그러나 인간들의 사건을 꾸며 내지는 않는다. 에세이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거나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사건들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소설 속의 인간의 사건과 에세이 속의 사건은 다르다. (……) 소설의 사건들이 진실한 허구라면 에세이의 사건들은 진실한 현실인 셈이다. 그러나 에세이는 진실한 현실을 떠나서 이상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처럼 에세이는 현실을 근거로 현실을 상상하여 이상화시킬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에세이는 산문이면서 소설보다 표현성을 강조하게 된다.

 

인용문을 꼼꼼히 읽어 보면, 수필에서는 “인간들의 사건을 꾸며 내지는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수필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거나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사건들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라는 것이고, “소설 속의 인간의 사건과 에세이 속의 사건은 다르다.”라는 의미이다. “소설의 사건들이 진실한 허구라면 에세이의 사건들은 진실한 현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truth)의 현실성(reality), 현실성(reality)의 진실(truth)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인용문에서 분명한 것은 수필의 인물이나 사건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을 근거로 현실을 상상하여 이상화시킬 수 있는 일이다.”라고 기술했다. “현실을 상상하여 이상화”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여기서 “현실을 상상하여”라는 의미 자체가 ‘재생적 상상력’이다. 수필의 상상력은 ‘창조적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과 사실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상화한 표현성의 확장을 통해 재생하는 ‘재생적 상상력’이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가야대학교 강사.

저서 : 평론집 7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5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

이메일 shin1004a@hanmail.net

 

작성 2025.02.26 10:20 수정 2025.02.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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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