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이라는 거대한 숲을 걷다 보면 때로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볼 일이 있다. 시간이라는 물결은 쉼 없이 흘러가지만 그 속에서 특별히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내게는 40여 년 전 일본 주재원 시절 일본 닛코(日光)에서의 경험이 그러하다.
도쿄 근교의 관광지 닛코는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봄이면 벚꽃이 흩날리고, 여름이면 초록의 신록이 우거지며, 가을이면 단풍이 물들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곳이다. 이곳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놓은 듯하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신으로 모신 도쇼궁(東照宮)은 그 자체로 시간의 미술관이다. 불교와 신도, 도교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화의 하모니는 오랜 세월 빚어낸 술처럼 깊은 향기를 품고 있다.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입구에 새겨진 세 마리의 원숭이 조각이다. 동화 속 현인들처럼 이 원숭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지혜를 전한다. 눈을 가린 원숭이(미자루), 입을 막은 원숭이(이와자루), 귀를 막은 원숭이(키카자루). 이 세 원숭이는 삶의 깊은 진리를 조용히 속삭인다. 일본어로 '하지 않는다'를 뜻하는 '자루(ざる)'와 원숭이를 뜻하는 '사루(猿)'의 절묘한 언어유희는 보지 말아야 할 것, 말하지 말아야 할 것, 듣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깊은 교훈을 전한다.
이런 모습은 통도사나 향일암 같은 유명 사찰에 가면 귀여운 세 동자승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있다. 즉 나쁜 것은 보지도 말고(不見), 듣지도 말며(不聞), 말하지도 말라(不言)는 법구경의 참뜻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우리 조상들이 출가하는 신부에게 전하던 지혜와도 닮았다. '첫 3년은 장님처럼, 다음 3년은 귀머거리처럼, 마지막 3년은 벙어리처럼 살라'는 말은 때로는 침묵이 금이 되는 순간이 있음을 일깨우는 삶의 나침반과도 같다. 옛사람들의 이 지혜로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귀중한 삶의 지침이 된다.
예를 들어 젊은 시절 한 중견기업 회장으로부터 임원 추천을 부탁받은 적이 있다. 대기업 임원 출신으로 유망했던 한 후배를 추천하면서 나는 그에게 귀중한 조언을 건넸다. 대기업과는 달리 개인기업 오너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며 첫 3개월은 오직 귀만 열어두라고 당부했다. 잘 참아오다가 3개월이 다 될 무렵 그는 회의 석상에서 오너에게 직언을 했고 결국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웅변적인 대화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이었다.
역사의 물결 속에서도 이러한 지혜의 중요성은 빛을 발한다. 15세기 말 일본의 전국시대, 300여 명의 군웅들이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의 파도처럼 격랑을 일으킬 때였다.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들은 마치 거센 파도 위에서 춤추는 배와 같았지만 결국 마지막 승자는 폭풍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았던 이에야스였다. 그의 승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 인내와 지혜가 만들어낸 기다림의 결과였다.
이에야쓰, 그는 화려한 인물이 아니었다. 시대라는 바람이 특별히 그의 편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겨울을 견디는 소나무처럼 인내했고 바위를 뚫고 피어나는 꽃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그의 지혜와 판단력 행동력과 조직력은 모진 비바람 속에서 단련된 것이었다. 대나무가 바람에 휘어질지언정 꺾이지 않듯이 그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오다 노부나가의 그림자 아래에서 때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을 낮추었지만 결국 일본을 평정한 것은 인내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울지 않는 새는 죽여 버린다는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장 훌륭하다는 것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그의 인내심은 역사를 새로 썼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닛코의 세 원숭이가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춰준다. 남의 잘못만을 되풀이하고 이성이라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채 감정이라는 파도에 휩쓸리기도 한다. 특히 국민의 대표기관인 여의도 국회나 정치는 어떠한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고, 배려라는 꽃은 시들어버린 채 네 탓이라는 가시만 난무한다. 대화는 메아리처럼 같은 소리만 반복될 뿐 진정한 소통은 실종된 지 오래다.
이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부터 변화’가 필요하다. '남 탓을 하기 전에 내 탓'을 먼저 하는 성찰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농부가 가뭄의 하늘만 탓하지 않고 더 깊이 땅을 파는 것처럼 우리도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가끔 말을 세우고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기다려준다는 그들의 지혜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닛코의 세 원숭이나 동자승이 보여주는 삶의 지혜는 폭풍 속의 등대와도 같다. 난세를 이긴 이에야스의 삶과 세 마리 원숭이의 침묵 속 암시가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 요즘처럼 혼란한 난세에 미래를 향한 올바른 길을 비춰주기를 소망해 본다.
[가재산]
한류경영연구원 원장
한국디지털문인협회 부회장
미얀마 빛과 나눔 장학협회 회장
저서 : 『한국형 팀제』, 『삼성이 강한 진짜 이유』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아름다운 뒤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