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은 사람을 바람나게 한다. 봄바람은 비단결처럼 부드럽다. 솜털을 간질이는 듯 몸에 감긴다. 마른 대지를 날아온 바람은 대지의 따스한 열을 받아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면서 공중으로 떠오른다. 봄이면 사람의 마음이 설레는 것은 이 상승기류 때문이다. 그래서 봄바람은 단순한 설렘이 아니다. 그러니 억누를 길도 없으며, 억누를 이유도 없다.
섬은 작정하고 떠나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사람 공해 없는 섬에서 봄을 맞이하는 것이 더 나을듯하여 새벽부터 배낭을 꾸려 연안부두로 달려간다. 3월 첫 연휴인지라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은 아침부터 인산인해다. 짙은 해무 때문에 서해 도서로 가는 모든 여객선 출항이 지연되고 있지만 섬에서 봄바람 만날 생각에 설렘만 가득하다.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출발한 페리는 1시간 40분 정도 달려서 덕적도 진리선착장에 도착한다. 여기서 다시 하루 1번 왕복하는 페리로 갈아타고 약 13㎞ 떨어진 굴업도로 향한다. 섬은 도시처럼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도, 물자가 풍족한 곳도 아니다. 도시 기준에서는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 도시의 편리함에 길든 사람에게 섬은 필연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을 동경하게 되는 것은 불편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의 마음의 충만함과 정신적 해방감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국내 백패킹의 성지로 널리 알려진 굴업도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육지와 동떨어진 섬의 특성 때문에 다양한 야생화와 독특한 식물, 그리고 희귀조류와 곤충들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어 ′한국의 갈라파고스′로 불린다. 생태·지질학자들이 생태자원과 살아 있는 지질 교과서라고 평하고, 문화재청이 ′국내 어디서도 보기 힘든 해안 지형의 백미′라고 인정한 명소이다.
덕적도를 출발한 지 40여 분만에 굴업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민박집에서 마중 나온 트럭을 타고 언덕을 지나 숙소가 있는 큰말에 도착한다. 숙소에서 식사를 마치고 큰말해수욕장 뒤편에서 개머리언덕을 향해 오른다. 개머리언덕이란 이름은 그 생긴 모양이 꼭 개의 긴 주둥이를 닮았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 한다. 언덕들이 높지는 않지만 섬 왼쪽 끝까지 다녀오려면 왕복으로 2시간쯤 걸린다.

봄을 재촉하는 옅은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동백나무와 소사나무 관목들이 우거진 수풀 언덕을 지나 곧 수크령이 가득한 초원에 올라선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작은 능선들이 모두 이 자리의 조망을 위해 마련된 듯싶다. 수크령 초원 사이로 난 오솔길은 완만한 경사로 끝없이 이어지는데, 좌우로 넘실대는 파도와 바다에 멈춰 선 섬들의 풍경을 모두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걷는다. 이처럼 삼라만상의 자연은 모두가 자유자재이지만 우리 인간만이 사소한 것에 마음의 덫을 걸어 그 마음을 가두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산허리 한 굽이를 넘어설 때마다 초원이 넓게 펼쳐지면서 너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산자락 능선에 점점이 자리한 텐트들 정경이 안온하게 다가온다. 능선을 보자기처럼 덮고 있는 수크령은 미세한 해풍에 잔물결치고, 발목에 스치는 풀 포기들이 낯설지 않아 잃어버린 향토적 서정의 한 자락이 느껴진다. 15여 년 전, 서해안에서 가장 빼어난 해안 절경을 지닌 이곳에서 직장동료들과 이곳 수크령 군락지에 텐트를 치고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보며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냈던 오래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경사진 듯 평탄한 듯 쭉 곧은 듯 구부러진 듯 완만한 숲길은 촉감 좋게 다져진 흙길이어서 넉넉한 마음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묘한 감칠맛이 느껴진다. 산자락에 버티고 서서 세찬 해풍을 막아주는 소사나무숲을 지나면 여린 수크령들이 봄이 실린 해풍에 흔들리는 소리가 귓전에 머물다 간다. 이런 길을 걸으며 마음이 열리지 않을 이, 행복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낮도 좋지만 개머리언덕은 해거름 녘부터가 더 좋다. 드넓은 금빛 모래 해변과 해변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굴업도의 석양을 떠올리면 개머리언덕을 찾은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빛 공해가 없는 밤바다의 맑은 하늘 위로 별들은 강물처럼 흐른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어 진한 아쉬움을 안고 큰말 해변으로 내려선다.

큰말 해변에 있는 숙소에서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부터 목기미 해변을 따라 섬 산행을 시작한다. 굴업도에서 해안 길이가 가장 긴 목기미 해변에 도착하니 바다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좌우로 연평산과 덕물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굴업도는 덕물산과 연평산, 개머리언덕 등 100여m 높이의 야트막한 산들이 뼈대를 이룬다. 국내에서는 신두리 해변 말고는 찾아보기 힘든 해안사구를 지나서 이 섬의 최고봉인 덕물산을 오르면서 소사나무숲에서 꽃사슴 일가족을 조우하는 행운도 누린다. 20여 년 전, 섬에서 키우던 대만 꽃사슴이 사육장이 없어지면서 방목되어 수백 마리로 늘어나 이제는 섬 생태계를 해치는 유해 야생동물로 전락해 버려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적정한 개체 수를 유지하여 사람과 사슴이 함께 살아가는 섬으로 남아주기를 기원해 본다.

가파른 암릉을 지나 덕물산 정상(德物山, 138m)에 올라서니 정면으로 연평산이 마주하고 바다에는 승봉, 자월, 이작, 문갑, 선갑, 백아, 굴업, 선미, 덕적, 소야 등 주변 섬들이 떠 있다. 이곳에서는 바다 위에 얹힌 해무마저 쉬기 위해 구름을 걷어주니 산정에 선 사람은 눈이 밝아지고 영혼까지 맑아지면서 ′삼라만상이 도장 찍히듯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불가의 ′해인(海印)′ 경지에 올라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산정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사위를 둘러본다. 섬의 형태가 사람이 엎드려서 일하는 것처럼 생긴 데에서 굴업도라고 한다는데, 10여 년 전에 다녀온 스코틀랜드 스카이섬의 ′올드맨 오브 스토르 트레킹′이 떠오른다. 섬 서북부 해안의 깎아지른 거대한 현무암 절벽 바위 위로 난 초원길을 따라 황홀한 바다 풍경을 만끽한 10여 년 전의 상념 위에 오늘 굴업도에서 느끼는 감성이 자연스럽게 오버 랩 된다.
해변으로 내려서는 산자락 곳곳에는 수십 년 아니 알 수 없는 시간으로부터 이곳에 거주했던 섬사람들의 집터와 그들이 힘들게 일군 경작지 등 고단했던 삶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고도(孤島)에서 태풍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버텨낸 섬사람들의 애환 어린 삶의 편린(片鱗)들을 반추해보면서 해변으로 내려선다.

물 빠진 모래 해변으로 넘어가기 전에 해안사구 습지 지형의 움푹 팬 분지가 나온다. 이곳은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고여 연못을 이루는데 이때 각종 물벌레와 미꾸라지 등이 서식하는 독특한 생태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한다. 굴업도의 명물 코끼리 바위는 연평산 아래 해안에 있다.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내므로 물때를 잘못 맞춰 가면 못 보고 돌아오기에 십상이다. 코끼리보다 맘모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높이 5m의 거대한 몸집을 가진 바위는 코와 하나의 다리로 몸체를 지탱하고 있다.

1박 2일의 굴업도 여정을 마치고 덕적도로 향하는 나래호에 몸을 싣는다. 덕적도로 향하는 선상 갑판에 서서 굴업도를 바라본다. 어찌 산이 변할 것인가. 어찌 바다가 변할 것인가. 산과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푸르고 아득하다. 뭍으로 가는 여객선이 하얀 포말(泡沫)로 선을 긋지만 이내 지워진다. 그래서 이내 바다를 가슴에 담는다. 저잣거리에 돌아가서 삶이 힘들거나 가슴이 답답하면 이 바다를 꺼내보리라.
*굴업도: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90㎞,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13㎞ 거리에 있다. 굴업도는 백패킹의 성지로 널리 알려진 섬이다. 4월에서 10월 사이의 주말과 휴일이면 텐트를 배낭에 싸맨 백패커들로 항상 만선이다. 따라서 여유롭게 굴업도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주말과 휴일은 가능한 피하는 게 좋다. 이 섬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개머리언덕, 큰말해변, 목기미해변, 붉은모래해변, 덕물산, 연평산, 코끼리바위 등이다. 굴업도 가는 페리선은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는데 덕적도까지 1일 2회 운항하며, 덕적도에서 굴업도는 1일 1회 운항한다. 최근 2월 말부터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굴업도를 잇는 직항 여객선 ′해누리호′가 매일 1회 왕복으로 취항하고 있어, 덕적도에서 환승하는 불편을 감수했던 백패커들에게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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