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1788-1860)가 그의 ‘삶의 지혜’에서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 곱새겨보자.
“옛날 선인이 진실로 말하기를 세상에 세 가지 큰 세력이 있다. 슬기와 힘과 운인데 내 생각에는 그중에서 운의 영향력이 제일 크고 유효하다. 한 사람의 삶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같아 운이란 바람에 따라 배가 빨리 가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열심히 계속해서 노를 저으면 항해에 좀 도움이 되겠지만 갑자기 돌풍이라도 불게 되면 노 젓기는 헛수고가 되고 만다.
그러나 순풍을 만나게 되면 노를 저을 필요도 없이 순항하게 된다. 운의 위력이 스페인의 한 속담에 잘 표현되어 있다. 네 아들에게 행운을 주고 바닷물에 던져버리라. 하지만 일컫노니 이 찬스 우연이란 아주 고약한 놈이라서 믿을 게 못 된다. 그래도 우리에게 빚진 것도 없고 또 우리가 받을 권리나 자격은 없지만 어디까지나 일방적으로 주는 선심과 은총에서 선물로 주겠다면 이런 은혜를 찬스 말고 그 누가 우리에게 우연히 베풀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린 언제나 겸허히 기쁘게 이를 받을 희망을 품을 뿐이다. 누구나 시행착오의 미로를 통해 한평생을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 지나치게 부당한 자책을 하기 보단 여러 시점에서 행운을 놓치고 불행을 맞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 할 것 같으면 한 사람의 인생살이가 전적으로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닌 두 가지 요인의 산물인 까닭에서다. 일어난 일련의 사태와 이를 어떻게 자신이 처리해왔는가로 이 둘이 항상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수정해왔기 때문이다.”
이상의 말을 한 구절로 줄인다면 ‘운에 맡기기’가 되고 우리말로는 진인사대천명이 되리라. 하지만 우리가 시도하고 도모하는 일이 성사되든 안 되든, 그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모두가 다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우리 생각 좀 해보면 이 얼마나 기막힐 기적 이상의 행운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본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우리 각자 두뇌 속에 하늘의 수많은 별만큼의 신경 세포인 ‘뉴론들’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해보지 못했을 일들도 하늘의 별만큼 많지 않은가.
오래전 내가 젊었을 때 본 영화 '장고가 생각난다. 1960년대 이탈리아산 서부활극인 이 영화는 할리우드산 서부극과 대조적인 '마카로니 스파게티 웨스턴'이라 불린 변종으로 세르지오 코르부치(1927-1990) 감독의 1966년 작인데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리는 대신 관을 끌고 다니는 프랑코 네로(1941 - ) 주연의 반영웅 장고의 최종 결투 장면이 압권이었다. 한 패거리 악당들 말발굽에 총잡이 손목이 무참히 짓밟혀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게 된 장고는 복수심에 불타 절치부심 끝에 어느 한 묘지에서 그 악당들과 재대결, 방아틀을 뗀 기관총을 못 쓰게 된 손 대신 팔목으로 쏴 대면서 처절한 복수를 하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어려서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일정시대 학병으로 끌려간 어떤 한국의 한 젊은이가 일본군 병사로 어느 동남아 섬에서 전투 중 심한 총상을 입고 패잔병으로 낙오되어 피를 흘리며 밀림 정글 속을 기어가다 표범이 달려들자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뒹굴면서 싸운 끝에 이 사나운 표범의 아가리를 찢어 죽이고 살아났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젊은 날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취재한 화재 현장에서 내가 직접 목격한 장면으로 불이 난 집안에 살던 가족 중에 몸 성한 사람들은 다 불에 타죽었는데 폐병 결핵 말기로 각혈하며 몸져누워 있던 환자 한 사람만 불길을 뚫고 뛰쳐나와 산 실화가 있다. 아, 그래서 우리말에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대부분 사람은 타고 난 자신 가능성의 극히 제한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살고 있다. 자신들의 가능한 의식과 영혼의 아주 작은 분량만 사용하고 있다. 마치 자신의 온몸 기관 중에서 새끼손가락만 까딱거릴 줄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각자 타고난 잠재 능력을 몇십몇백 분의 일도 다 써보지 못하고 만다는 뜻이다. 참으로 큰 역경과 난관에 부닥칠 때 이에 걸맞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면 큰 불행과 위기일수록 그 더욱 큰 축복과 좋은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으랴.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야 다시 높은 산을 오를 수 있고 절망의 깊은 밤을 지나야 동트는 희망의 새 아침을 맞을 수 있듯이. 저 아라비아 사막에서 수백 년을 산 다음 화장하는 불더미에 올라 스스로 분신, 타죽었다가 바로 그 잿더미 속에서 새로 태어나 되살아난다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조(神鳥) 피닉스같이 말이어라. 우리말에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다. 현대 서양의학에서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약 성분이 없는데도 약품이라고 믿으면 그 어떤 약 못지않게 약효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곧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을 통해 어떤 신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로 신앙을 포기함으로써 좀 더 참다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신앙이란 마음 문을 닫느냐 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독선과 아집으로 편애하는 신답지 못한 신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몇 년 전 한국에서는 ‘없다’ 시리즈가 유행했었다. ‘예수는 없다’, ‘붓다는 없다’를 비롯해서 ‘한국은 없다’, ‘한국사는 없다’가 있었는가 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깨달음은 없다’라는 책까지 나왔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역설적으로 ‘예수는 없다’가 되었다. 이쯤에서 스님이 ‘절이 죽어야 부처가 산다’는 책을 쓸 법도 하다. 하버드대 펠레그리노 석좌교수이며 미국 학술원 회원으로 20여 권의 과학 명저를 저술해 미국 국가과학메달과 국제생물학상을 수상한 에드워드 윌슨(1929 - )의 저서들은 한마디로 ‘생태계 없이는 인간도 없다’로 요약될 수 있다.
인도의 과학, 기술, 생태계연구재단의 대표로서 개발과 세계화란 명목으로 자연을 약탈하고 있는 서구 문명을 비판해 제3세계의 노벨상인 ‘올바른 삶을 기리는 상’ 수상자인 반다나 시바(1952 - )의 저서들은 ‘자연=여성, 과학=남성’으로 해석, 이성과 합리성 맹신이 생태 재난의 주범이라며 직관과 포용의 여성성 회복을 주장한다. 과학은 어머니인 대지를 죽였으며 ‘과학(남성)이 죽어야 자연 (여성)이 산다’는 것이다. ‘자연 없이 인류문명도 없다’는 결론이다.
이른바 ‘사랑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세계의 모든 종교인이 교리를 초월해서 사랑으로 대동단결하기는커녕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파쟁만 일삼아 왔으니 이교도와 이방인 정벌에 나선 십자군이 또한 분열하여 혼란을 일으킨 나머지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타락시키고 말았다. ‘종차별주의, 곧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인종 차별주의이며,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다. 잡아먹거나 실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은 노예제도만큼이나 나쁜 짓이다.’
이것은 20여 년 전(1999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생물 윤리학 강좌를 맡도록 선임되어 물의를 빚었던 피터 싱어(1946 - )교수가 ‘동물 해방(1975)’이란 그의 저서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이제 서력기원 21세기를 맞은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는데도 자연환경은 물론 정치 사회 경제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동트기 직전이 가장 깜깜절벽이 아니던가. 결코 비관하고 절망만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시지탄을 금할 길 없으나 근년에 와서 소위 선진문명 사회의 동향이 180도로 급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서양사람들이 동양으로 눈을 돌려 우리 동양 고유의 오래된 노장철학과 원효의 화쟁사상 그리고 단군의 홍익 인간사상 등에서 인류의 구원과 진로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사회는 월등한 물질문명의 힘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지구생태계를 파괴, 인류의 자멸을 재촉해 왔다. 이제 더 이상 기존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즉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관, 착취 대상으로서의 대인관, 아전인수식의 선악관이나 흑백이론의 이분법으로는 그 해답이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종교, 사상, 철학, 과학, 의학, 문학, 예술 각 분야에서 서양의 선각자와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마치 종전의 주기도문 외우듯 물아일체, 피아일체, 물심일여를 읊조리는 것을 종종 듣고 보노라면 우리는 절로 회심의 미소 완이일소하게 된다.
얼마 전 서양의 세계적인 과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평생을 두고 과학과 천문학에 전념해온 결과로 얻게 된 결론이 동물, 식물, 광물 가릴 것 없이 ‘생명은 하나’라는 것과 또 하나는 본질적으로 별의 원소와 인간의 원소가 같은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만고의 진리를 우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알았는데 말이다. 여름밤 시골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별 하나 나 하나’라고 노래하지 않았나.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듯이 우리가 죽으면 별이 되는 것이리라.
이미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는 더 이상 로봇이나 노예처럼 재미없고 흥미롭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고 신나게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어떤 삶이 창조적인 삶일까. 말할 것도 없이 가슴 뛰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각자의 그리움을 그리고 쓰는 그림과 글, 각자의 혼불을 지피는 노래와 춤을 미치도록 죽도록 부르고 추어보는 일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