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우리 민족 정서의 아름다움, 곡선(曲線)의 미(美)

홍영수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을 리모델링했다. 힘든 것은, 묵은 살림살이 중에서 버릴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잡다한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어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베란다 구석진 자리에서 발견한, 이곳저곳의 폐사지에서 가져왔던 와편들을 버리는 일이었다. 몇십 년 함께한 그들과의 이별을 끝내고 잠시 쉬는 동안 눈에 띄는 것이 청화백자였다. 십수 년 전에 황학동 근처 길거리에서 구입한 도자기이다.

 

분주한 와중에 다시 한번 청화백자를 이리저리 돌려 보기도 하고 거리감을 두어 살펴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며칠 전 우연히 마주한 서재의 책장에서 박재삼 시인이 번역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의『朝鮮과 藝術』이라는 자그마한 책을 읽으면서 그의 한국 예술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朝鮮과 藝術'에는 여섯 가지의 주제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조선의 미술〉, 〈석굴암의 조각에 대하여〉, 〈아, 광화문이여!〉, 〈조선 도자기의 특질〉, 〈조선의 목공품〉, 〈조선인을 생각한다〉이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의견을 기술했는데, 집안의 청화백자를 보는 순간 다시금 <조선 도자기 특질>의 페이지에 책갈피로 표시해 놓았다.

 

그리고 그의 책에 시인 셸 리가 말한 “가장 슬픈 것을 노래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노래한 것이다”를 보았고, 또한, “한국의 미가 의지한 데 없이 가냘픈 線(선)으로 표현된 것을, 뭇 침략에 의한 살아남은 자의 더없이 슬픈 곡선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로 놀라운 慧眼(혜안)은 실로 놀라운 직관이었다”라고 써 놓은 옮긴이의 박재삼 시인의 글도 보았다. 

 

조형예술은 형태와 빛깔 그리고 선으로 이루어진다. 조화로움과 안정미가 형태라면, 화사함과 대륙의 중국 도자기는 형태미가 뛰어나고 섬나라 일본 도자기는 색채가 아름다운, 반면에 반도인 우리나라 도자기는 누가 뭐래도 유려하고 섬세한 곡선미가 아닌가 싶다. 아담하면서도 색채는 은은하고, 부드럽게 흐르는 미려한 곡선미, 바로 우리 도자기기가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곡선미는 우리나라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것은 다양한 예술품에서 곡선미가 미적 감각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곡선의 미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며, 울면서 웃고, 웃으면서도 우는 민족의 정신과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어느 해, 오대산 등산길에 상원사를 들러 범종각의 동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때 보았던 동종의 비천상은 지금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다. 옷자락을 휘날리며 선녀가 구름 물결을 헤치고 하늘을 올라가는 비천상(飛天像)이 양각되어 있었다. 이 같은 천의무봉 곡선의 손길에서 하나의 그림이 아닌 곡선의 그림에서 우리 민족의 예술미를 발견했다.

 

우리나라의 도자기나, 기타 공예의 무늬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 문양이 바로 대표적인 '유음수금(柳陰水禽)'의 그림과 이른바 '운학(雲鶴)'일 것이다. 휘어 늘어진 수양버들의 곡선미와 구름 속을 유유히 나는 학, 휘어진 버들가지를 즐기고 구름과 학을 정겹게 생각한 결과에서 나온 문양일 것이다.

 

또한, 경주에서 보았던 신라의 왕릉, 자그마한 산처럼 높고 크지만, 부드러운 곡선으로 감싸여 있는 모습에서 긴장감 없는 평화와 다정다감한 정을 느꼈었다. 이처럼 우리의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곡선의 미가 우리 민족의 혈관을 통해 맥맥이 내려오는 것 같다. 행여 누가 볼까 타는 가슴 달래 보는 흘러내린 눈물의 곡선, 농경민의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는 다랭이논, 전통 와옥에서 볼 수 있는 용마루와 처마 끝의 곡선에서 한국인의 예술은 선(線) 중에서도 곡선의 미를 추구하는 예술이 아닌가 싶다. 

 

원고를 끝내며 다시 한번 청화백자를 들여다본다. 활활 불타오르는 가마 속, 강한 산화염이 일본과 중국의 도자기라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도자기는 분명 연기가 많은 환원염으로 구워냈을 것으로 믿고 싶다. 비록 가스가마에서 구워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나라 도공들은 인위적인 가감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뿐, 그 나머지는 자연에 맡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5.03.10 10:48 수정 2025.03.1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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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