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말, 친구들과 봄을 만나러 서울에서 가까운 청계산을 찾았다. 입춘과 우수가 지난 지 한참이건만 계곡에는 아직 얼음이 겨울을 붙잡고 있고, 꽃샘추위가 여전히 봄을 시샘하고 있어 봄이 왔는데 봄을 느낄 수 없었다.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4대 미녀 중 하나이자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雁)가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반해 떨어졌다고 하여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녀의 미모가 대단했다. 그러나 궁녀들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畫工) 모연수(募延壽)가 자기에게 재물을 바치고 아부하는 궁녀들의 모습만 아름답게 그려서 황제에게 올렸는데, 왕소군은 뛰어난 용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뇌물을 주지 못해 형편없이 그려지는 바람에 입궁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황제인 원제에게 간택되지 못했다.
마침 끊임없이 한나라를 위협하던 흉노의 왕 호한야(呼韓邪)가 원제에게 혼인 화친을 청하자, 한나라에서는 제일 못생긴(?) 왕소군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는데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가는 날 원제가 왕소군의 용모를 처음 보고는 뛰어난 미모에 크게 놀랐다. 그는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 싫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라 돌이킬 수가 없었는데, 원제는 크게 노하여 모연수를 죽이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오랑캐의 나라로 시집간 비련의 여자 왕소군은 이역만리 흉노 땅에서 봄을 맞이할 때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늘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당나라 측천무후의 좌사였던 동방규(東方虯)는 ′소군원삼수(昭君怨三首)′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은 왔어도 봄이 봄 같지 않구나
봄이 도래하였는데 실정이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지금도 널리 회자(膾炙)되는 명시구다. 왜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 마는 정 붙일 곳이 아니니 봄이 되어도 봄 같이 마음 설렘이 없다는 뜻이다.
어느덧 3월 중순이다. 계절은 봄에 들어서지만, 지금 우리 사회도 춘래불사춘의 현실을 겪고 있다. 사상 초유의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 속에서 국론마저 첨예하고 분열되고, 여야가 강경하게 대치하고 있으며, 외교·안보·경제 분야에서 국정 공백이 계속되고 있는 극한 상황이다. 국제적으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행정부 출범으로 세계 질서의 격변이 시작되었고, 파격적인 관세 정책 등 이른바 ′트럼프 스톰′이 급격하게 진행 중인데도 우리는 리더쉽 부재로 대응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어 국민의 체감온도는 여전히 한겨울이다.

이제 곧 춘분(春分)이 다가온다. 이때야말로 향긋한 봄꽃의 향기가 산자락으로부터 살갑게 다가오며 춘풍이 스치며 지나가는 곳곳마다 파릇파릇하게 돋아난 이파리들이 봄의 향취를 가득 풍겨올 것이다. 우리는 늘 주기적으로 위기를 겪어왔고, 세계가 놀랄 만큼 위기를 잘 해결해왔다. 작금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의 우수한 DNA를 십분 발휘하여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진정 포근하고 화사한 마음의 봄이 하루빨리 찾아오길 고대해 본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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