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간 합의에 ‘최종적이며 비가역적인 해결’이란 단서에 사용된 이 ‘비가역’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일’로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2016년 1월 8일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저서 ‘나의 투쟁(1925)’이 절판 70년 만에 재출간됐다.
이 책은 1925년 36세의 히틀러가 뮌헨 폭동으로 투옥됐던 당시 나치즘의 사상적 토대를 정리한 자서전이다. 그간의 출간 금지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과는 달리 뉘우칠 줄 아는 독일 양심의 상징처럼 묘사됐는데, 이 악명높은 책이 다시 나오게 되자 세계 언론에선 나치즘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한 조치라고 합리화하며 미화했다.
일본군이 우리 윤동주를 비롯해 수많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생체실험했다지만 독일도 1904년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땅을 뺏기 위해 헤레로족과 나마족 수만 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생존자 2,000여 명을 강제수용소에 처넣고는 생체실험을 한 후 시체는 연구용으로 썼다지 않나. 그런데도 독일은 거듭되는 나미비아 정부의 사과 요구에도 100년이 지난 2004년에야 학살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것도 총리가 아닌 경제 개발 장관이 연설을 통해 한마디 한 것이 전부고, 경제적 배상은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은 왜 유대인에게만 고개를 숙이나. 말할 것도 없이 미국 내 유대인의 영향력은 크고 강하지만 나미비아인은 미약하고 무시할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불편한 진실은 국제사회 인간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계에서도 항상 통용되고 있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아닌가. 우리가 가축을 사육해서 잡아먹고, 의료약품이나 미용에 필요한 화장품 개발을 위해 동물생체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물질문명의 개발로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면서 기후변화를 초래해 지상 모든 생물의 멸종 현상을 재촉해 오지 않았는가. 어쩜 현재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 범유행 역병이 급기야 자연의 자가 치유의 자정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뭣보다 인간이 먼저 멸종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의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게 아닐까. 그야말로 반신반수라 할 수 있는 인간이 ‘불가역적’ 짐승으로 전락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가역적’으로 신격으로 우리 인격을 높여 볼 것인가 하는 선택지가 있지 않은가. 영어로 개를 ‘dog’이라 하지만 이 단어를 거꾸로 보면 신 ‘god’이 되듯이 말이다. 실존과 당위를 뜻하는 말로 독일어로는 ‘자인(sein)’과 ‘졸렌(sollen)’이 있고, 영어로는 ‘투비(to be)’와 ‘옷트투비(ought to be)’란 기본 동사가 있는데, 주어진 본능대로만 살아야 하는 짐승의 삶이 전자라면 본능을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인간의 삶은 후자이리라.
우리 냉철히 한 번 깊이 생각 좀 해보자. 우선 가역, 불가역할 때 ‘역(逆)’이란 한자 거스를 ‘逆’을 바꿀 ‘易’으로 대치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동물처럼 바꿀 수 없는 불가역(不可易)의 삶을 살지 않고, 창조적 가역(可易)의 자유라는 엄청난 특전을 받은 우리 인간이라면, 이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 수 있을까. 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이자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선택받은 인간으로서의 우리 실존 ‘What We Are’가 조물주가 우리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면, 우리의 당위 ‘What We Become’은 우리가 우리의 조물주에게 바치는 우리의 선물이 돼야 하리라.
몇 년 전 미국 CBS 방송은 당시 49세의 구글의 컴퓨터 엔지니어 토드 화이트 허스트가 매사추세츠주(州) 케이프 코드에서 자신의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생면부지 8명의 자녀들과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자녀들을 번갈아 껴안은 후 매우 경이로운 순간이라며 “비록 내가 현재 이 아이들의 (법적이고 사회적인) 아버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앞으로 이 아이들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1998년 스탠퍼드대학과 대학원 재학 시절 ‘젊은 남성의 정자를 구한다’는 교내 광고를 접한 뒤 정자기증을 결심했다. 젋은 백인이자 명문대 재학 중인 학생의 정자는 특히 인기가 높았기에 그는 4년간 같은 클리닉을 통해 약 400회 정도 정자를 기증했다. 정자 기증은 철저히 익명으로 시행됐으며, 그에게는 기증자 아이디(ID)가 주어졌다. 정자를 받는 여성 역시 기증자의 나이나 인종, 출생지 등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받았다.
화이트 허스트와 8명 자녀들의 만남은 그의 자녀 중 한 명인 사라가 ‘정자기증 출생 형제자매 찾기’를 통해 생물적인 아버지와 형제들을 찾으면서 추진되었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나도 그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년 시절부터 자위행위로 허무하고 헛되게 내쳐버린 수많은 내 정자들! 심히 후회스럽고 안타깝게 아쉽지만, 다시 좀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아닐 것 같다.
내 생리적인 씨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한 게 내 정신적 또는 내 영적인 씨라면, 지난 84년간 살아오는 동안 사랑으로 내 쉰 숨 하나하나,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 내디딘 발 한 걸음 한 걸음, 써 재낀 글 한줄 한줄, 내 언행 하나하나가 모두 다 내가 뿌린 씨들이 아닌가.
좋은 씨도 나쁜 씨도, 잘 뿌린 씨도 잘못 뿌린 씨도, 비옥한 땅에 아니면 가시덤불 또는 모래밭이나 자갈밭에 떨어진 씨도 있었겠지만, 얼마만큼이라도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열매를 내가 직접 거두게 되든 아니든 더 할 수 없이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이다. 어떻든 사랑의 씨를 뿌리면 사랑의 열매가 맺힐 테고, 많이 뿌릴수록 수확도 커지리라.
따라서 생리적이든 아니든, 성적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 ‘사랑의 대자녀’가 되어보리. 2013년 개봉된 미국영화 ‘월터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나오는 노래 ‘스페이스 오디티’와 1986년 개봉된 영화 ‘미숀’에 수록된 ‘스타맨’을 ‘글램록의 전설 데이비드 보위(1947-2016)가 불렀다.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사물들, 벽 넘어, 그리고 방안에 숨겨져 있는 사물들, 접근하기 위험한 사물들을 보고 놀라워하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다.”
이 문구는 ‘월터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속 배경이 된 미국의 유명 잡지라이프의 모토다. 월터미티는 라이프 잡지에서 필름을 관리하는, 마흔이 넘도록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지만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셰릴을 짝사랑하는 남자이다. 도무지 용기를 내지 못하는 그는 상상으로만 그녀에게 다가간다.
평생을 살면서 뭔가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어딘가를 가본 적도 없이 상상만 해오던 그에게 늘 그와 같이 작업하던 사진작가로부터 필름이 배달된다. 라이프는 오프라인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인 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경영진은 전설의 사진작가 숀오코넬의 사진으로 마지막호의 표지 사진을 장식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숀이 필름 가운데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필름은 어디에도 없다. 월터는 그 필름을 얻기 위해 숀을 찾아 나선다. 개봉 당시 이 영화의 홍보문구 ‘꿈꾸기를 멈추고 살기 시작하라’가 이 영화가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상상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행동의 삶 곧 모험을 감행하라는 뜻이리라.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존 오도노휴(1956-2008)의 2004년에 나온 책 ‘아름다움: 모든 걸 품는다’에 ‘아름다움을 축복함’이란 기도문이 있다.
아름다움을 축복함
네 자연의 신성을 네가 볼 수 있도록,
네 삶의 아름다움이 네게 잘 보이기를.
지상의 모든 경이로움이
네 모든 작은 비밀의 감옥으로부터
너를 불러내 가능성의 초원으로 인도하기를
하루가 얼마나 큰 기적인지 볼 수 있도록
동트는 새벽빛이 네 눈을 뜨게 해주기를
황혼의 저녁기도가
네 모든 두려움과 어둠을
편안함으로 감싸주기를
어려움을 겪을 때면
기억의 천사가 지난날의 수확을
뜻밖의 선물로 갖고 널 찾아주길
네 가슴속 희망의 촛불을
어떤 검은 구름이 꺼버리지 않기를
너 자신에게 너그럽고
네 삶을 하나의 큰 모험으로 여기기를
외부의 공포와 절망의 소리가
네 안에 메아리치지 않기를
절실한 네 정신의 지혜를
네가 언제나 따를 수 있기를
네가 한 모든 선행과 사랑 그리고
네가 겪은 모든 고통이 깨우침으로
네 삶을 천만 배로 축복해주기를
그리고 사랑이 네 문을 두드리거든
온 세상이 새벽을 반기듯
네가 그 찬란한 빛을 받아들이기를
네 영혼에 닿는 신(神)의 입김을 느끼면서
너를 영원토록 빚고 지켜주며 부르는 네 영원성의 기쁨을
네가 고요와 정적 속에서 찾을 수 있기를
혼란과 걱정과 공허함이 있다 해도
네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음을 알기를
네 삶이 네가 조용히 바치는 성찬으로
네 주위로 베풀어져 의심이 경외심으로
거북함과 긴장됨이 우아함과 고상함으로
좌절된 희망이 날개를 달고 고뇌가 마침내
평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신성한 아름다움이 너를 축복해주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