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술 당기는 날은 꾸리꾸리한 날이다. 낮술을 먹으면 제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낮술에 취하고 싶은 날이 있다. 낮술로 인생의 즐거움을 삼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낭만과 거리가 먼 좀 초라한 모습으로 먹는 술이 낮술이다. 누구는 여자한테 차여서 대낮부터 병나발을 불고 누구는 되는 일 없어 혼자 술잔을 기우이며 낮술을 홀짝이고 또 누구는 그냥 술이 좋아 낮술을 마셔댄다. 젊은이들은 낮술을 마셔도 좀 멋있어 보인다. 노인들이 마시는 낮술은 못난 인생을 섞여 마시는 것 같아 짠하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니까 이해가 간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고 한숨이 나오는 날도 있고 죽고 싶은 날도 있다. 낮술은 고달픈 삶을 위로 받기에 참 좋은 친구다. 그래서 노영석 감독은 ‘낮술’을 영화로 만들었나 보다. 저예산 독립영화 ‘낮술’은 독립영화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이천 연도 초반 달랑 천만 원을 들여 만든 영화다. 그 천만 원은 노영석 감독의 어머니가 투자한 것이다. 천방지축 좌충우돌하는 젊은이들이 로드영화 ‘낮술’은 엉성함에 연민이 생기고 당당함에 웃음이 나는 영화다.
여자 친구에게 차인 혁진을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은 술자리를 마련한다. 낮술이다. 얼큰하게 취한 친구들은 술김에 당장 내일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의기투합한다. 다음날 정선 터미널에 도착한 혁진은 오지 않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다들 술먹고 뻗어버려서 오지 못한다는 말만 듣는다. 결국 하는 수 없이 홀로 여행을 시작하는 혁진, 그 여행은 꼬이기 시작하고 험난한 일들의 연속이다. 힘들게 도착한 펜션에서 혁진은 아름다운 여자와 마주치게 되고 은근히 그 여자를 사랑할 것 같은 예감에 들뜨지만, 같이 온 남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실망한다. 그래도 아닌 척하며 가져온 와인을 그 커플과 같이 먹는다. 낮술인 것이다.
터미널에서 강릉 가는 버스를 탄 혁진은 옆좌석에 탄 이상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어린 남자에게 꼬리치면서 어떻게 한 번 꼬셔보려는 애쓰지만, 거절이라는 걸 모르는 혁진은 처음으로 거절하고 여자를 겨우 떨쳐낸다. 강릉 바다에 도착한 혁진은 백사장에서 라면에 소주를 마신다. 역시 낮술이다. 그러다가 다시 펜션에서 만났던 꼬시고 싶었던 여자와 그 여자의 남자 친구를 만나 비싼 회를 먹고 노래방까지 가서 놀며 호구를 당하고 만다. 인사불성이 된 혁진은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옷까지 다 벗겨간 나쁜 사기꾼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바지는 벗겨가고 웃옷만 남은 혁진은 산골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한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남자의 트럭을 얻어 타고 저녁까지 얻어 먹지만 트럭 운전사는 술을 먹어서 운전을 못하니 자고 가자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트럭 운전사와 같이 자게 되지만 트럭 운전사는 게이였다. 도망쳐 나온 혁진은 친구 기상이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데리러 오라고 하고 도착한 기상에게 빨리 서울로 가자고 하지만 기상은 이왕 왔으니 펜션 하는 선배 집에 예쁜 사촌 여동생이 있으니 같이 놀다 가자고 한다. 역시 거절을 하지 못하는 혁진은 같이 간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강릉 가는 버스에서 자신을 꼬시려고 했던 못생긴 그 여자를 만나는데 그 여자가 선배의 예쁜 사촌 여동생이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로드여행에서 혁진은 낮술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경계해야 할 사람도 많다. 젊을 때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여행, 그 여행은 술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인연이 될 수도 있고 악연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은 오해로 점철되기도 하고 원하지 않게 어긋나기도 한다. ‘낮술’은 동어반복으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하고 언어유희로 관객을 조롱하기도 한다.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청년의 경험 과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만 강원도의 우울한 풍경이 겨울이었기에 낮술과 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액세서리 같은 ‘낮술’은 로드여행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으로 얼룩졌지만, 그 속을 들춰보면 젊은 남자의 순수도 있고 거절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우유부단함도 있고 유치함도 있고 창피함도 있으며 무모함을 그대로 드러낸 걱정도 있고 천연덕스러움도 있으며 진지한 리얼리티도 있다. 젊은 날 누구나 겪었을 질풍노도의 이야기를 보며 한참을 웃어볼 수 있는 영화다. 돈 처발라서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마음 맞는 젊은이들이 뭉쳐서 만든 아마추어들의 용기와 모험이 참 좋아 보인다.
우리 안에 있는 세속적인 욕망을 감추지 않고 때론 낯 두껍게 그대로 드러내고 때론 찌질하고 유쾌하게 발가벗겨 관객들을 몰고 간다. 누구나 살면서 얼떨결에 어떤 상황으로 그냥 끌려 들어가는 일이 있다.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결정하지도 못하며 거절도 못 하는 사람들은 ‘낮술’이 마치 자신의 젊은 날과 닮아있어 웃고 말지 모른다. 짠내 나는 삶에 지친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다가 슬그머니 공감할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의 나를 투영한 것 같아 낮술 한 잔 때리고 싶어질 것이다.
‘낮술’을 보면서 찌질한 주인공 때문에 실컷 웃다가 끝나고 나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거울 속의 내가 주인공 혁진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개연성 없는 주인공의 행동에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저예산으로 힘들게 만든 로드여행 영화에 해학이나 반전이나 메시지를 기대하는 건 과하다.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주연 배우들을 보는 재미와 배우를 쓸 형편이 안 되어서 영화 스테프들이 투입한 친구나 지인들의 좀 모자란 연기를 보는 것도 재미 중의 재미다.
이 무모한 독립영화 ‘낮술’은 전주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소개되며 입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로테르담 영화제, 토론토 영화제, 스톡홀롬 영화제, 홍콩영화제, 부에노스아이레스 영화제 등 해외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았다. 낮술이 땡기는 저예산 독립영화 ‘낮술’ 그냥 끌리는 영화다. 자꾸 여자에게 홀리는 한심한 주인공 혁진이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겨 싶은 영화다. 진심이다. 다 같이 빙 둘러앉아 고기 구워 먹다가 란희가 읊는 시가 자꾸 생각난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