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진서

김종삼 시인의 오래된 시 <어부>를 읊조려본다.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이런 호사를 누린다 싶으면서도 정말 큰 일이긴 하다 싶다. 이 시국에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나도, 나랏일도 말이다.

 

오스트리아의 사회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은 자신의 책『나와 타자들(Ich und Die Anderen)』에서, 지금의 우리사회를 설명하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을 제공한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과 퇴행의 양상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던 내게 이 책은 절망감의 끝에서 만난 행운이었다. 

 

이졸데 카림에 의하면 국가를 포함해서 특정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정치, 사회적 갈등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뉜다.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나의 의도를 읽어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12.3 계엄 이후 많은 이들이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들 중에는 한국이 지금까지 이뤄낸 민주주의의 성과 자체를 부정하는 이, 시대착오적인 종북이나 이념논쟁으로만 이 사태를 끌고 가려는 이들까지 실로 다양하다. 

 

나의 관심사는 이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체제이지 완결된 구조가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독재의 구조, 파시즘이 되고 말것이다. 생각해 보라. 民主가 어떻게 하나의 완결된 구조일 수 있겠는가. 주인이라고 간주되는 民의 개념이나 범주를 규정하는 것부터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난 40여년 동안 87년이후의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체제를 만들었으며, 그러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상당 수준의 경제부흥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화려한 포장지와는 무관하게, 그 내용물이 알차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지금의 한국상황은 껍데기뿐인 포스트 민주주의가 어떻게 순식간에 비민주적 사회로 역행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이졸데 카림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그녀가 말하는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는 경제적 이익과 결부된, 흔히 말하는 분배 문제와 같은 것을 지칭한다. 반면 '나눌 수 없는 갈등'은 세계관이나 정체성의 문제, 혹은 문화나 가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측정할 수 없기에 어떤 협상이나 타협의 정량적 기준을 지니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나눌 수 있는 갈등은 물질적 갈등이기에 상호인정이나 교환, 타협이 가능한 갈등으로 어떻게든 봉합될 수 있다. 그러나 나눌 수 없는 갈등은 그저 인정하거나 불인정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식의 양극단만이 존재한다. 대체로 이러한 갈등은 그 본질상 화해 불가능한 국면으로 치닫기에 십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를 극심한 혼란과 분열로 내몰고 있는 사안이 과연 나눌 수 있는 갈등인가 그렇지 않은 갈등인가. 나의 소견으론 지금의 한국상황은 두 갈등이 팽팽하게 맞서곤 있지만 그 둘 간의 상충보다는 확증편향으로 인한 일종의 범주 오류의 문제가 훨씬 더 중차대한 문제처럼 보인다.

 

개인적 차원이든 공동체의 입장에서든 이 둘의 범주를 제대로 경계 짓지 못하면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함께 해결해야 할 갈등을 불합리한 방식으로 극단까지 몰고 가거나, 반대로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에 '수용'해야 하는 사안을 두고 불필요하게 사회적 역량을 낭비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초유의 이 사태는 그간 한국사회가 숨 가쁘게 달려오기만 했다는 방증이면서, 동시에 여태껏 방치해 두었던 문제들을 지금에라도 해결하라는 신호로 읽고 싶다. 한꺼번에 분출된 묵은 갈등들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견뎌내야 할 시간이 길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 어쩔 도리는 없다. 터진 부분을 한 땀씩 기워가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우리들만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이 때, 우리가 조율하고 공유해야 할 기본전제는 필요하다. 이념의 문제를 기능주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하나씩 수선해 간다면 조금 더 유용하게 쓰일 제도적 차원의 사안을 이념적으로 해결하려고 든다면 곤란하다. 가치는 주입될 수도, 교육될 수도 없다.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대신 그것은 각자가 받아들여서 자신의 삶 속에서 성찰하고 실천해야 할 문제이다.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서 일방적으로 선언하거나 주장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이럴 때, 우리가 '우리'라는 동질성으로 단일 대오를 이뤘던 국난 극복의 과정을 떠올려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참담한 마음을 뒤로 하고 이번 계엄사태를 다른 결로 바라본다면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하나가 되려 했고, 실제로 하나가 되었던, 우리를 지탱해 준 가치체계를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멀리는 단군이 계셨던 시절의 홍익인간부터, 이순신의 생즉사 사즉생 정신도 좋겠다. 지금은 무엇보다 우리민족이 쪼개어지던 그 순간에도,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던 그때를 상기해야 한다. 누구이든, 어떤 경우이든 그것의 상위에서 군림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그동안 우리가 피로써 대가를 지불했던 법치, 민주공화국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5.03.21 16:00 수정 2025.03.2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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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