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은 1576년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충무공의 무과 급제 합격자 명단인 「만력4년병자식년문무잡과방목」이 현전하는 까닭으로 충무공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동기들의 명단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동기 가운데에는 박대남(朴大男)이라는 인물이 있다. 방목에 따르면 박대남의 자는 종백(宗伯), 본관은 죽산(竹山), 생몰년은 1554년, 거주지는 직산(稷山), 아버지의 이름은 박구령(朴龜齡)이다. 『난중일기』에도 박대남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다음은 그러한 기록 가운데 하나이다.
『난중일기』, 1596년 6월 20일
이날 12시경에 남해현령이 들어와서 (교서에) 숙배한 뒤에 이야기하고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원유남)도 와서 15순을 쏘았다. 그 뒤에 안으로 들어가서 남해현령 박과 밤이 깊도록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임달영도 들어왔는데, 소를 거래한 명세서와 제주목사(이경록)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원문] 當日午 南海倅入來 肅拜後 話而射帿. 忠淸虞候亦來 十五巡. 後入內 与朴南海細話 向夜而罷. 任達英亦入來 則貿牛件記及濟牧簡來.
위 『난중일기』 기록에 박대남의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조응록의 『죽계일기』 1596년 4월 24일에 박대남이 남해현령으로 제수된 기록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위 『난중일기』 기록에 나타난 남해현령이 박대남임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 1596년 2월 11일에는 박대남을 그의 자로 칭하여 박종백(朴宗伯)이라고 기록한 내용도 있다. 『난중일기』 1596년 2월 11일에 임달영이 제주로부터 박종백(朴宗伯)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고 한 점과, 『난중일기』 1596년 6월 20일에 임달영과 박대남이 같은 날 한산도로 들어왔다고 기록된 점을 종합해보면 박대남은 임달영과 함께 제주에 있다가 남해현령으로 제수되어 한산도로 올 때 임달영과 동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난중일기』 기록에 따르면 박대남은 충무공 이순신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 『난중일기』 1596년 6월 20일 일기뿐만 아니라 같은 해 6월 21~23일 일기에도 남해현령이 등장하는데, 함께 식사하거나 이야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충무공과 박대남은 과거급제 동기이기도 하지만, 고향 또한 가까웠다. 방목의 기록에 나타난 박대남의 거주지 직산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충무공의 고향 아산과 가까운 고을이었다.
박대남의 집안 족보인 『죽산박씨가보』에 따르면, 그는 죽산박씨 문정공파(文靖公派) 파조 박원정(朴元貞)의 6대손이다. 박대남의 아버지 이름은 방목에 ‘박구령(朴龜齡)’으로 기록된 점에 비해, 족보에는 ‘박구령(朴九齡)’으로 기록되어 있다. 족보에 따르면 박구령의 부인은 연안김씨(延安金氏) 진사(進士) 김극수(金克粹)의 딸이다. 『연안김씨대동보』를 확인해보면 김극수는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셋째 아들인 김잉(金仍)의 증손자로서 그의 둘째 사위는 죽산(竹山) 박구령(朴龜齡)이며 박구령의 아들은 현령(縣令) 박대남(朴大男)이다. 즉, 『죽산박씨가보』가 박대남의 아버지 박구령의 이름 ‘朴龜齡’을 '朴九齡'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죽산박씨가보』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문장가로 유명한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이 박대남의 고모부로 기록된 점이 흥미롭다.
언뜻 보기에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인물인 박대남의 신상을, 필자가 굳이 자세히 살펴본 이유는 아래의 『난중일기』 기록에 나타난 박대남의 행적 때문이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4일
오후에 곡성에 이르니 관사와 마을이 모두 비어 있었다. 같은 고을에서 숙박하였다. 남해현령 박(박대남)은 곧장 남원으로 갔다.
[원문] 午後 到谷城 則官舍及閭里一空. 宿于同縣. 朴南海直徃南原.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8월 3일에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유서를 받았다. 위 『난중일기』 기록은 그 다음날 기록으로서 남해현령 박대남이 남원으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남원은 8월 12일에 일본군이 남원 교외에 진을 치면서부터 남원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위 일기에 나타난 박대남의 행적은 현전하는 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들 가운데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여러 명 포함되어 있다. 전라병사 이복남, 구례현감 이원춘, 별장 신호(전 낙안군수) 등이 그러한 인물들로서 그들의 이름은 『난중일기』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박대남 또한 이들과 함께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난중일기』에는 남원성 전투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지만, 이후 남원성 전투 소식을 들었을 충무공 이순신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남원성 전투의 순절자에 관한 연구 자료는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조중화, 1996)와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순절자의 무덤과 제향 연구」(박현규, 2019)가 대표적으로서 관심이 있는 독자들께서는 이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죽산박씨가보』에 따르면 박대남의 자녀는 외동딸 한 명이며, 박대남의 형제자매는 누이 한 명밖에 없다. 박대남의 아버지 박구령의 이름이 족보에 잘못 기록된 까닭은, 박대남의 후손이 끊겨서 후일 먼 친척들이 족보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박대남의 아버지 이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고자료]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만력4년병자식년문무잡과방목([萬曆四年丙子式年]文武雜科榜目)」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응록(趙應祿), 『죽계일기(竹溪日記)』 권2, 「병신만력이십사년(丙申萬曆二十四年)」 4월 24일
조중화,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 학민사, 1996
박현규,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순절자의 무덤과 제향 연구」, 『일본연구』 제32집,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2019
『죽산박씨가보(竹山朴氏家譜)』
『연안김씨대동보(延安金氏大同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