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보는 인문칼럼] 이봉수 작가의 '아버지의 퇴직금'

 

안녕하십니까. 코스미안뉴스 한별 기자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적 영양결핍은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 인문칼럼을 통해 따뜻한 사유의 글로 가슴을 채워가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인문칼럼은 이봉수 작가의 ‘아버지의 퇴직금’입니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이지만 한국전쟁 때 우리 집은 거제도로 피난을 갔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릴 때 미군이 최후 방어선을 긋고 우리 마을을 불지른 후 소개 명령을 내렸다. 증조부님이 소 한 마리 몰고 족보만 짊어진 채 집을 나서자 온 식구들이 고향을 등지고 증조할아버지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그때 농사짓는 열아홉 살 소년이었다. 거제도로 가는 피난길에 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부산진공고로 가서 제2훈련소에서 단 사흘 동안 제식훈련과 총 쏘는 방법만 배워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때가 정확히 1950년 8월 30일이다. 같이 간 청년들 대부분은 전사했으나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판문점에서 포로 교환까지 해주고는 휴전선 일대에서 몇 년을 더 복무한 후 6년 만에 제대해서 다시 농부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천상 농부였다. 재작년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고향에서 사시사철 농사만 짓고 사셨다. 약 15년 전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로부터 밝은 목소리의 전화가 왔었다. 농사꾼이 퇴직금을 받았다고 아이들처럼 기뻐하셨다. 정부에서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복무한 것에 대한 퇴직금을 계산하여 130만 원이나 준다고 하면서, 그것도 안 주면 어쩔 것이냐며 공돈이 생겼다고 즐거워하셨다.

 

그러시냐고, 잘 되었다고 하면서 전화는 끊었지만, 사지를 넘나들며 전장을 헤맨 이등상사의 6년 분 퇴직금이 고작 백삼십만 원이라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졸부나 고관대작들 하룻저녁 술값도 안 되는 돈 아닌가. 이 돈으로 내기 골프는 몇 홀이나 칠 수 있을는지. 민주화운동 보상금으로 억 억 소리 예사로 들었는데, 나는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50년 동안의 이자는 어떻게 계산했는지 몰라도 청춘을 바쳐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헤맨 6년의 대가가 금 일백삼십만 원 정이라! 나는 그때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전에 아버지는 늘 참전용사 배지를 달고 다니면서 퇴직금까지 받았다고 자랑하셨다. 이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참전용사들도 생존해 계시는 분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 자유를 지켜낸 이분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주는 것이 나라의 자존이며 우리 후손들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봉수 작가의 인문칼럼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작성 2025.04.08 12:16 수정 2025.04.0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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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