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끼적끼적 대부도 방조제를 달린다. 차는 여태 제자리걸음이고 안개는 진즉부터 바다와 뭍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방아머리 선착장에 도착하니 바다를 막던 해무가 뭍까지 삼킨다. 간혹 햇빛이 침범하면 안개는 잠시 놀란 듯 허공으로 도망치다 다시 땅으로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자월도행 페리는 예정보다 30여 분 늦게 뭍을 떠난다.
자월도 가는 뱃길은 온통 해무로 가득하다. 그동안 섬이나 바닷가에서 안개를 본 적은 더러 있지만 이렇게 지독한 해무는 낯설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섬 가까이 다가서니 선착장 왼편에 있는 독바위가 홀로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다.

자월도 달맞이길을 걷기 위해 섬 뒤에 있는 목섬으로 가는 길에 만난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늑하게 느껴진다. 민가의 지붕에는 거친 해풍에 견디기 위해 굵은 로프가 감겨있고, 집 앞에는 진달래와 동백이 만발해 있다.포장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니 산 중턱에 엄청나게 큰 버드나무가 허리에 안개를 감고 있다. 모진 해풍을 버텨내고 묵묵히 서 있는 그 모습이 너무 대견스럽다.

안산 대부도에서 배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자월도(紫月島)는 ′자월′이 ′달이 붉어졌다′는 뜻인데, 조선시대 이 섬에 귀양 온 사람이 보름달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달이 붉어지고 폭풍우가 일어 하늘도 자기 마음을 알아준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산모퉁이를 도니 손에 잡힐 듯 아담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젖은 하늬께마을이 다가온다. 초록에 물든 국사봉 산자락과 검은 자갈에 덮인 해안가, 그리고 푸른 바다가 한데 어울려 마음마저 자연에 녹아드는 기분이다. 하늘을 나는 바닷새들과 점점이 뿌려진 작은 섬들, 그리고 하얀 포말을 내며 달려오는 파도를 보느라 발걸음이 점점 늦어진다.
밀려오는 파도는 열정이고
스쳐 지나가는 해풍은 그리움이다

자월도의 부속섬인 목섬에 오르니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며 꽃동산을 이룬다. 목섬에서 구름다리를 건너가 안목섬의 전망대에 서면 바위 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그동안 섬을 둘러싼 해무를 거둬내고 가슴을 뒤흔드는 코발트빛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온몸을 푸르게 물들인다.
안목섬에서 하늬께 해수욕장으로 가기 위해 구름다리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거친 자갈 해변을 따라 쪽빛 바다와 요철 형상의 해안 절벽, 바다를 오가는 배를 보면서 봄 바다의 낭만을 즐기는 가운데 한가로운 하늬께 해수욕장에 도착한다. 갯벌이 드러난 하늬떼 포구에는 고깃배 대여섯 척이 물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포구 앞 어촌 마을에는 원색 지붕을 얹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섬마을 정취를 뽐낸다.

이제 자월도에서 제일 높은 국사봉을 오르기 위해 바다를 버리고 산자락으로 접어든다. 민가 담벼락에서 오솔길로 팔을 펼치고 나온 진달래들과 눈 맞춤하러 발걸음을 자주 멈추다 보니 이 공간에서는 시간이 멈추어 있는 느낌이 든다. 국사봉으로 오르는 산길에서는 길 위에 쌓인 소사나무 낙엽들이 발밑에서 바스락바스락 콧노래를 불러준다. 소나무, 갈참나무와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군락 숲길 사이로 간간이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꽃잎이 수줍은 듯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봉수대를 지나면 자월도에서 제일 높은 국사봉(166m)이 나온다.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있는 정자는 자월도를 360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뷰 포인트다. 특히 국사봉 아래에는 수령 30년 된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600여 그루가 식재되어 있어 핑크빛 봄의 향연이 펼쳐진다.

현란했던 겹벚꽃의 잔영을 눈에서 잠시 지우고 섬의 좌우를 가로지르는 자월도 달맞이길을 따라 발걸음을 계속한다. 바다를 향해 환하게 열린 쉼터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고요한 숲이 품어내는 피톤치드 향을 즐기며 호젓함을 누린다. 천문공원으로 이어지는 아련한 능선길을 따라 걸으며 왼쪽으로 서해의 수려한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가 자월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 있는 큰말로 내려선다. 큰말해수욕장을 가로질러 동백꽃이 아직도 처연하게 피어있는 해안도로를 지나서 장골해변 초입에 있는 독바위로 들어선다.

독바위는 썰물 때만 건너갈 수 있는 외로운 섬이다. 홍해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는 바닷길을 체험하기 좋은 곳인데, 마침 바닷길이 열려 있어 섬 두 개가 연결되니 엄마 잃은 고래 같아 갑자기 시구(詩句) 하나가 떠 오른다.
물에 떠 있어야만 섬이냐
외로우면 나도 섬인 것을
고운 모래가 1km 길이로 펼쳐진 장골해수욕장을 지나 선착장 부근에 있는 어부상 전망대에 오른다. 여기서 바라보는 독바위와 장골해변은 자월도 최고의 풍경으로 잠시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든다. 선착장에는 할 일 없는 배들만 한가롭게 떠 있고 어부상 전망대 위로 거친 해풍이 분다. 전망대 위에 선 사람들도 이곳에서는 풍경이 된다.

오늘 화려한 봄빛에 물든 자월도 달맞이길을 걸으며 느닷없이 고독을 느낀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봄꽃 무리에 밀려난 산길 댓잎 향이 코끝을 맴돌 때 울컥 치며 올라온 서걱대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섬을 떠나니 그 외로움은 더욱 깊어만 간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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