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이 없었으면 무슨 낙으로 살까. 이 엄혹한 시절에 술이라도 있으니 다행 아니던가. 비겁하게 술 뒤에 숨어서 세상을 방관한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술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숨 쉬고 산단 핑계라도 댈 수 있다. IA는 갈수록 진화해서 새로운 종으로 지구를 지배할지 모르는데 우린 한가하게 대폿집에 앉아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허허 웃고 있다. 누구는 주막이 낙원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술이 백약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한다. 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술꾼들이다.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소동파도 술에 절어 살았다. 절었다는 건 내가 좀 과장했지만 그의 시를 보면 술을 주제로 쓴 시가 많다. 일찍 출세하면 그만큼 남들에게 견제와 시기를 받게 마련이다. 소동파는 22세에 과거시험에 급제해서 당시 왕안석의 급진적 부국강병책을 반대해 평생 지방 오지를 떠돌며 한직과 유배 생활로 고달픈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니 술이 당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동파에게 위안을 주는 건 술과 자연과 문학이었다. 산승과 벗하며 불경도 공부해 상당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고급 공무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지만 바른말 잘하는 성격 덕분에 후대에 문학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거친 술은 질이 나쁜 사람 같아서
칼이나 화살처럼 사람 몸을 공격하네.
그러다가 의자에서 고꾸라지게 만드니
싸움을 벌이지 않고도 이겨 버리네.
시인의 기세는 웅대하기 짝이 없고
선사의 말소리는 부드럽고 분명한데
나는 술에 취해서 알아듣지도 못한 채
눈앞이 빙빙 도는 현기증만 느꼈네.
그러다가 깨어나니 달이 강물에 빠져 있고
바람 소리와 낙엽 구르는 소리 들려오는데
감실 앞 장명등만 가물거릴 뿐
시인과 선사 두 호걸은 보이지 않네.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른 소동파는 ‘금산사에서 유자옥과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해서 보각선탑에 누워 잠들었다가 밤중에 깨어나 벽에 적다’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썼다. 술꾼이라면 누구나 이 시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술 먹고 패가망신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공감하는 시다. 술 먹고 개가 되어본 사람도 이 시를 읽으면서 괜히 찔리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홍대에 가보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남의 집 문을 잡고 토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본다. 술은 젊으나 늙으나 많이 마시면 몸을 지배하고 정신까지 지배해서 술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다.
소동파는 북송시대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소식’이지만 스스로 동파거사라고 불렀다. 천재 예술가이자 못 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이었다. 시, 그림, 철학, 수필 등 다방면에 뛰어났으나 정치 하나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치까지 잘했으면 스트레스로 아마 일찍 죽었을지 모른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담을 만큼의 그릇을 타고나는 것이라 믿고 싶어진다. 중국은 초등학교에서 소동파의 작품을 4편 가르치고 중학교에서는 3편, 고등학교에서는 4편을 가르친다. 이백은 초중고 12편이고 두보는 초중고 11편인데 소동파는 이백이나 두보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증거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대주의가 팽배했다. 고려 때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자기 이름 중에 ‘식’을 소동파의 원래 이름 ‘소식’에서 따와서 썼고 그의 동생 이름도 소동파의 동생 ‘소철’에서 따와 김부철로 지었다고 한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는 “소동파의 문장은 금은보화가 창고에 가득 찬 부잣집 같아 도둑이 훔쳐 가도 줄지 않으니 표절한들 어찌 해롭겠는가?”라고 칭송했다. 조선의 학자 서거정은 “선생의 기개와 절조는 우주를 능가하고 문장은 별처럼 빛나기만 하여라”며 소동파를 우주대스타로 찬양했다.
그러나 정작 소동파는 우리 민족을 업신여긴 혐한파의 대표주자였다. 그는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금수와 같아서 너무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면 커다란 혼란에 빠지고 만다”라며 우리를 얕잡아보고 오랑캐라고 배척했다. 아마 소동파는 열등의식으로 꽁꽁 묶인 사람이라는 방증일 수도 있다. 지금도 큰 나라를 무조건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이 많으면 인재도 많은 법이지만 큰 나라에 무조건 머리 조아리는 사람들 너무 많다. 우리도 이제 제대로 된 한국인의 힘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남의 나라 똥구멍만 빨면 개밖에 더 되겠는가.
술은 예나 지금이나 대륙 사람들이든 반도 사람들이든 섬사람들이든 예술의 주제가 된다. 시를 낳고 소설을 낳고 웹툰을 낳고 드라마를 낳고 영화를 낳는다. 거친 술도 좋고 부드러운 술도 좋지만, 막무가내로 마시면 예술을 낳는 것이 아니라 술망나니가 된다. 술과 여자와 노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 바보로 지내게 된다고 한다는 명언처럼 맨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에겐 술이라는 벗을 두어도 좋을 것이다.
거친 술은 질이 나쁜 사람 같아서
칼이나 화살처럼 사람 몸을 공격하네.
그러다가 의자에서 고꾸라지게 만드니
싸움을 벌이지 않고도 이겨 버리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