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7년 7월 16일 통제사 원균 휘하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다. 당시 충무공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주둔지인 경상도 초계에서 백의종군하고 있었는데, 7월 18일 새벽에 칠천량해전 패배에 관한 소식을 접하였다.
그 소식을 접한 뒤 얼마 있다가 도원수 권율이 충무공을 찾아와 사후 처리를 논의하였는데, 충무공이 직접 연해 지역으로 가서 대책을 정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권율이 기뻐하며 이에 응하였다. 이러한 당시 상황은 『난중일기』 1597년 7월 18일에 기록되어 있다.
7월 18일 곧바로 초계를 출발한 충무공은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을 거쳐 7월 19일 단성현(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이르러 그곳에서 숙박하였다. 다음날인 7월 20일에는 단성현의 수령 단성현감 등이 찾아왔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20일
아침에 권문임의 조카 권이청이 와서 만나고 고을 수령도 와서 만났다. 12시경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가의 정자에 이르니 진주목사가 와서 만났다. 굴동의 이희만의 집에서 숙박을 하였다.
[원문] 朝 權文任姪權以淸來見 主倅亦來見. 午到晋州定介山城下江亭 晋牧來見. 宿于屈洞李希萬家.
* 정개산성: 원문 ‘定介山城’은 ‘鼎蓋山城’의 오기이다. 지금의 경남 하동군 옥종면의 두양리와 종화리에 걸쳐 있는 정개산에 있었으며, 1596년 체찰사 이원익의 명에 의해 진주목사 나정언이 쌓았다. 정개산성의 축성 기록은 성여신의 『진양지』에 실려 있다.
위 기록에 언급된 권문임은 1576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서 「국조문과방목」에 그의 신상이 실려 있으며, 충무공과는 과거 급제 동기이다. 방목에 따르면 권문임의 거주지는 단성이며, 『안동권씨복야공파세보』에 따르면 권문임의 생몰년은 1528~1580년으로서 그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1597년 7월 충무공이 단성에 이르자 그 지역에 살던 권문임의 조카가 권문임 대신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안동권씨 가문의 문집인 『화산세기』에는 권문임의 조카 권제(權濟)가 정리한 권문임의 연보가 수록되어 있다.
위 기록에 언급된 진주목사는 나정언(羅廷彦)으로서, 그의 자는 사미(士美), 본관은 나주(羅州), 생몰년은 1558~1601년이다. 그는 1592년 의병장 정문부가 함경북도 경성을 수복할 때 정문부 휘하에서 경흥부사로서 공을 세웠으며, 1597년 7월경에는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의 명에 의해 정개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나정언의 신상과 행적은 「경진별시문무과방목」, 『나주나씨족보』, 『선조수정실록』의 기사(권26, 선조25년-1592년 9월1일 정사 20번째 기사), 『난중잡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족보에 따르면 그는 나주나씨 금양군파(錦陽君派) 파조 나석(羅碩)의 8대손이다.
위 기록에 언급된 고을 수령은 단성현감을 말한다. 『선조실록』의 기사(권90, 선조30년-1597년 7월28일 정사 3번째 기사)와 조응록의 『죽계일기』(권3 「병신만력이십사년」 9월 14일)에 따르면 당시의 단성현감은 안륵(安玏)이다. 안륵의 신상은 「만력31년계묘식년사마방목」의 문과급제자 명단에 실린 그의 형 안경(安璥)의 가족사항과 『순흥안씨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족보에 따르면 안륵은 순흥안씨 첨추공파(僉樞公派) 파조 안종의(安從義)의 5대손으로서, 그의 자는 중온(仲溫), 생몰년은 미상~1650년이다.
본 칼럼이 안륵에 관해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보물 제571호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건립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운반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가 해남지역 유지들의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서 찾아내어, 다시 전남 여수시 고수동에 건립되었다.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가 다시 발견된 과정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 가운데 이에 대해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비문은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년)이 지었으며 김현성(金玄成)이 새겼다.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건립 경위는 이 비 옆에 함께 세워진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에 기록되어 있다. 동령소갈비에는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가 세워지게 된 과정과 함께 이 일을 담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절도사 안륵의 이름이 등장한다. 『광해군실록』의 기사(권129, 광해10년-1618년 6월8일 을축 11번째 기사)와 「전라좌수사선생안」에도 안륵이 1618년에 전라좌수사로 제수된 기록이 있다. 동령소갈비에 따르면, 당시 통제사였던 유형(柳珩, 1566~1615년)이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 건립을 처음으로 추진하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일이 몇 년 동안 지체되었다가, 이후 안륵이 새로 부임한 뒤 다시 일을 추진하여 반년이 지나 건립이 완료되었다.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그 끝부분에 ‘만력사십삼년오월립(萬曆四十三年五月立)’이란 명문이 있다는 이유로 1615년(광해군 7)에 비가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동령소갈비에는 경신년(1620년) 1월에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 건립을 완료한 안륵의 전라좌수사 재임 시기가 1618년 7월 ~ 1620년 12월이므로 동령소갈비에 기록된 1620년 1월이 정확한 건립 시기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 명문에 나온 건립 시기 1615년은, 이항복이 비문을 지은 시기이거나 김현성이 비문을 새긴 시기로 추정된다. 동령소갈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 건립이 여러 해 동안 지체되었기 때문에, 비문을 짓거나 이를 새긴 시기와 비를 세운 시기 사이에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듯하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세템, 「경진별시문무과방목(庚辰別試文武科榜目)」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세템, 「만력31년계묘식년사마방목(萬曆三十一年癸卯式年司馬榜目)」
국립중앙도서관, 『화산세기(花山世紀)』 권5, 「원당공하부록(源塘公下附錄)」-「연보(年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성여신(成汝信), 『진양지(晋陽誌)』 권4, 「임관(任官)」-「고적(古跡)」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응록(趙應祿), 『죽계일기(竹溪日記)』 권3, 「병신만력이십사년(丙申萬曆二十四年)」 9월 14일
국가유산청 국가유산디지털 서비스
『안동권씨복야공파세보(安東權氏僕射公派世譜)』
『나주나씨족보(羅州羅氏族譜)』
『순흥안씨족보(順興安氏族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