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모천회귀(母川回歸)

이태상

진리는 회색에 가깝다. 흑백이다, 선악이다, 선민이다 이방인이다, 남성이다 여성이다, 천국이다, 지옥이다, 영혼이다, 육체다하는 자타(自他) 타령의 이분법으로 동서고금을 통해 얼마나 많은 비인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금기와 타부가 강요되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한 처벌이 가해져 왔고, 아직도 양성적이 아니면 음성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서양 기독교의 원죄사상을 비롯해 남성 위주의 정조대, 마녀사냥, 그리고 동양의 원조 꼰대 사상인 효도의 치사랑, 삼강오륜, 남녀칠세부동석, 궁형 등 인간에게 오만 가지 만행이 자행되어오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중자애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몸과 마음이 같은 하나인지 다른 둘인지는 미지수로 제쳐 놓고라도, 우선 제 몸부터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 몸은 살아 숨 쉬며 가슴 뛰는 동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식욕과 성욕을 느끼게 마련이다. 육식하든 채식하든, 먹는다는 것은 신성한 것이다. 성욕도 마찬가지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형편에 따라서는 모조품을 통해서라도 성욕은 채워져야 한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미투 운동’을 잠재우고 각종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예방하는 차원에서라도 말이다.

 

대법원이 신체를 본떠 만든 성기구 ‘리얼돌’의 수입을 허가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이 문제를 두고 한국에서 뜨거운 논란이 불거졌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평지풍파인가. 이런 것을 영국인들은 찻잔 속의 폭풍이라 일컫는다. 찬찬히 좀 둘러보면 모든 것이 음과 양으로, 하늘과 땅으로, 산과 계곡으로, 낮과 밤으로 나뉜다. 오목할 요(凹)와 볼록할 철(凸)처럼 말이다. 

 

우리가 쉬는 숨조차 들이쉬고 내 쉬는 들락날락 출입(出入)이며,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생사조차 그렇지 않은가. 인류와 사촌지간이라는 원숭이 중에 보노보 잔나비가 있는데 이들 사회에선 모든 분쟁이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아무하고 교미 행위로 푼다고 한다. 월남전 당시 영국인 존 레넌과 일본인 오노 요코가 반전 노래 ‘이매진’ 메시지를 그들의 행위예술로 만천하에 전시한 대목이 연상되지 않는가. ‘Make Love, Not War!’ 그렇다면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인류가 연어나 송어처럼 모천회귀, Back To The Future, 하루빨리 Bonobo Primate로 퇴화하는 것이 진정한 발달이고 전진이며 진보가 되리라.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2천 5백여 년 전에 살았던 노자가 남긴‘도덕경’을 한 마디로 이렇게 풀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진리라고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데리다의 해체철학’이란 연구서를 펴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형호 교수(철학)가 한 인터뷰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상을 요약한 말이다. 

 

이것은 불교와 노장사상 그리고 원효의 화쟁사상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1998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그리스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1935-2012)의 ‘영원과 하루’는 1994년 ‘율리시스의 시선’을 찍는 동안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이탈리아 출신 배우 지안 마리아 블론테를 잃고 나서 살날이 딱 하루 남았다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란 생각에서 죽음을 소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죽음을 하나의 경계선 변경으로 다룬 것이다. 이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사람이 태어나 병들고 늙어 죽을 때까지 겪고 맛보는 갖가지 희망, 젊음과 향수, 사랑 등의 맥을 짚어볼 기회를 준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두 어린아이가 나누는 대화 속에 한 아이가 시간이 뭐냐고 묻는다. 그 해답은 고대 희랍의 철인 헤라클리투스(540-480B.C.)의 것이다. ‘시간이란 바닷가에서 조약돌 줍고 노는 한 어린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또 다른 고대 희랍의 철학자 파메니데스(515-450 B.C.)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의대로 그 당시 65세의 그 자신이 늙어가고 있는 만큼 정말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그는 말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 되지 그 이상의 영예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구상 시인(1919-2004)은 1998년 내놓은 그의 마지막 시집 ‘인류의 맹점’에서 유언 대신 ‘임종고백’을 남겨 놓있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써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기어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을까!

 

2000년에 출간된 ‘열여덟 산골 소녀의 꽃이 피는 작은 나라’에서 영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삶은 하나하나가 시가 된다면서 일기로 시를 만들라고 하네.”

 

영자의 아버지 이연원 씨는 그 후로 강도에게 살해되었고 불교 신자이던 영자는 비구니가 되었다는데 그 뒤 이 강원도 두메산골 부녀의 유고시집 ‘영자야, 산으로 돌아가자’가 나왔다.

 

체코의 시인으로 198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1901-1986)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써놓은 자신의 비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써 온 수많은 시구에 나도 몇 줄 보태어 보았지만, 귀뚜라미 소리보다 못한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네. 달나라에 사람의 첫발을 내디딘 발자국은 아니었어도 어쩌다 잠시 반짝했다면 내 빛, 내 소리 아니고 반사한 것뿐이네. 나는 사랑했다네. 시를 쓰는 언어를. 그러나 변명은 않겠네. 아름다운 시어를 찾는 것이 살생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이라네.”

 

스웨덴의 한림원은 1990년 노벨문학상을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1914-98)에게 수여하면서 ‘관능적인 지성과 인간적인 성실성을 특징으로 한 드넓게 트인 시야의 정열적인 시인’이라고 그를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그의 시 한 편을 그의 문학적인 신조로 인용했다.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그사이에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말하지 않는 것 그사이에

내가 말하지 않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그사이에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어버리는 것 그사이에

시가 있다.

 

이를 어쩌면 이렇게 풀이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시심을 갖고 내가 바라보는 만물의 시 정신과

그 억만 분의 일이라도 나타내 보려는 내 문장 그 사이로

그렇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너무도 보잘것없는 시늉과

제대로 형언할 가망조차 없는 무궁무진한 진실 그 사이로

이토록 내가 말할 수도 알 수도 없이 신비로운 현상과

내가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환상의 세계 그 사이로

땅과 하늘이 맞닿은 듯 아련히 저 지평선 너머로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구름처럼 사라지는 망상의 그림자가

마치 유령이 지나치듯 잠시 도깨비불 번득이는 것

그따위 그것이 모름지기 시라는 것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5.04.19 09:50 수정 2025.04.1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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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