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존재의 울음소리, 바람

홍영수

태풍처럼 강한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외출 중, 아파트 숲 사이에 있는 초등학교를 지나가는데 학교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는 화단에 걸려 있던 어린 학생들의 미술 작품들이 절반으로 구겨지고 찢기어 나뒹굴고 있었다. 

 

계절은 4월 중순이다. 순간 떠오르는 것은 토마스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작품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부분이다. 러면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이라고 한다. 이러한 4월에 어린 초등학생들의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져 이곳저곳으로 날리게 하는 4월, 그 반면에 <황무지>보다 오백 년 전에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4월은 ‘감미로운 소나기, ‘서풍 또한 달콤한 숨결로/모든 숲과 들판에서’라고 얘기한다.

 

두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말 잔인한 4월의 어느 날 오전이었다. 그런가 하면 오후 들어서는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뭇가지는 살랑살랑, 거리의 가벼운 옷깃들은 나풀나풀하며 운동장엔 학생들의 가벼운 옷차림과 뛰노는 모습 속에서 온전한 봄을 보는 듯했다.

 

이처럼 두 개의 양상으로 다가온 바람의 하루를 겪어 본 바람은 과연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분명코 바람은 강한 무언가의 메시지를, 또한 순풍 속에 일렁이는 속삭임의 여린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픔과 상처로, 때론, 기분 좋은 미풍으로 다가오고 쓰디쓴 기억과 달콤한 현실로 다가오기도 했다. 

 

이렇듯이 바람은 원초적 존재의 슬픔과 기쁨, 사랑과 미움의 감정 등을 전해 주기도 한다. 어쩜 바람이라는 존재는 흔들리는 내면의 영혼까지도 일깨워 주는 어떤 실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바람을 보고, 바람을 맞이할 때면 눈과 감응하고 피부로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바람은 자신이 흔들어 대는 사물들을 깨워 시인에게 전해 준다. 너의 존재 의미와 나의 존재 의미까지도

 

시인은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통해서 외로웠던 때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람결을 통해 우주적 기원과 상상력을 생각게 하는지도 모른다. 바슐라르는 우리의 정신이 갖는 상상력의 힘이 매우 다른 두 개의 축 위에서 전개된다고 한다. 하나는 새로움 앞에서 비약을 찾는 것이다. 즉 회화적인 것, 다양함, 또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적인 힘은 존재의 근원에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동시에 존재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사람과 사물, 영혼과 육체, 우주적인 존재를 이어주는 헤르메스이다. 또한, 시인은 자신의 소멸을 통해 만물을 열정적으로 포용하면서 관계를 맺어주는 큐피드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람과 함께 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울음소리이다. 어느 시인은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운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라고 했나 보다.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는 삼뢰(三籟), 즉 천뢰(天籟), 지뢰(地籟), 인뢰(人籟)라는 말이 나온다. 지뢰는, 땅 위에서 바람이 불어 수많은 구멍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이고, 인뢰는 사람이 부는 피리 소리처럼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희로애락의 퉁소 구멍에 감정의 바람을 불어 넣어 나오는 소리이다. 그렇다면 천뢰란 만물이 지닌 스스로의 성품에 따라서 음양의 기운이 천차만별로 다르게 어울려 나오는 소리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각자의 모습과 본성에 따라 스스로 소리를 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그래서 누구의 간섭과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소리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육체적인 두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울림을 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할 때, 바로 천뢰의 소리를 영혼의 귀로 들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에서 흔히 얘기하는 복음과 같은 것, 또는 불교에서 말하는 법어 같은 것은 아닐까. 또한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열린 마음의 소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토록 시인이 울부짖는 한 편의 시는 누군가에게는 헤르메스이고 큐피드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천뢰의 소리로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존재의 울음소리로 들려오는 바람과 같은.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5.04.21 11:21 수정 2025.04.2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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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