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사계절의 소리

김태식

얼마 전, 봄맞이 교향악단 연주회를 보고 나오면서 문득 계절은 저마다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고 자신만의 빠르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다가오는 소리는 왈츠 곡처럼 경쾌하지만 천천히 오고 빨리 간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앙상한 나뭇가지에 목련꽃을 피웠다 싶어 눈을 멈추면 꽃샘바람이 시샘하고 만다. 봄이 오는 속도는 안단테의 빠르기인데 가는 속도는 이것 보다 조금 빠르다. 

 

초록빛 움을 틔우는 이 기간에는 느리면서 구절구절마다 꺾이는 트로트를 부르게 한다. 나의 어릴 적 어머니들은 합창으로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기도 했다.

 

밭갈이를 잠시 멈추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노라면 봄의 졸음이 밀려오고 트럼펫 소리 같은 따뜻한 봄볕이 멀리서 다가오면 조용한 자장가가 되기도 했다. 아지랑이는 여린 속도로 아코디언 건반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이 다가온다. 

 

여름은 빨리 오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바쁘게 되돌아간다. 작열하는 태양이 지휘자이고 모데라토의 빠르기에 맞춘 오케스트라다. 형형색색의 옷차림을 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수평선에 맞춰 자리를 잡는다. 

 

연주자들이나 관객들의 몸매가 다양하다. 가느다란 금관악기같이 홀쭉한 걸음걸이가 있는가 하면 큰북같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넘실대는 푸르른 파도는 하프의 수많은 줄처럼 여러 겹으로 겹쳐 우아한 음색을 내기도 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여운을 남겨 놓고 밀려가기도 한다. 

 

마치 어레미를 연상케 하는 하프 줄을 지나온 파도는 물속의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노을이 지는 순간은 아쉬움의 합창이 시작되고 밤바다의 모래톱에 새기고 가는 물거품의 흐느낌은 바이올린의 선율을 닮았다.  

 

빨리 오고 빨리 지나가 버리는 가을은 알레그로의 빠르기에 노래를 부르게 하는가 하면 가을은 서산으로 지는 해를 따라가는 오보에의 부드러운 소리에 애잔함을 실어 보내는 독주회를 한다. 가을을 붙잡으려는 사람과 빨리 보내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을 함께 실어 보내는 가곡을 부르게도 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널리 알려진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읊조리게 만든다.

 

가을이 익어갈 무렵이면 감나무의 가장 높은 곳, 손이 미치지 않는 그곳에 까치밥이라는 이름으로 따지 못하는 감이 언제나 있다. 그곳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감은 늘 배고픈 새들의 먹이다. 그곳에서 새들은 자신들만의 만찬을 즐기고 청아한 목소리를 내면서 플루트의 연주에 맞춰 아리아를 부른다. 

 

가랑비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면 스르르 떨어지는 낙엽이 기타 줄을 튕기고 가을에 익은 벼와 비슷한 보호색을 지닌 메뚜기가 폴짝폴짝 뛰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가을 들판 길을 따라 활짝 피어난 코스모스는 제 멋을 부리느라 하모니카 반주에 맞춰 한들한들 목놀림을 한다. 마치 옥색, 하양, 노랑 저고리에 빗장 지른 자주고름이 바람에 날리듯 한다. 

 

겨울은 길고 아주 느리다. 라르고의 속도에 맞춰 노래하는 클래식처럼 차분하게 지나간다. 조용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겨울의 밤은 적막을 노래하고 잠 못 들어 하는 기나긴 밤에 귓속을 파고드는 살얼음 갈라지는 소리는 색소폰의 깊은 음색을 대신한다. 

 

긴 밤을 절규하듯이 장탄식을 토해 내기도 하고 세레나데의 애절함이 함께 묻어나며 소프라노와 테너가 함께 부르는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겨울은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갖지 못한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오르간 반주에 맞춰 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겨울은 때로는 활짝 핀 나팔꽃 모양의 호른이 내쉬는 호흡처럼 부드럽고 애조를 띠기도 한다. 창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을 따라 창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저 멀리서 바람에 실려 오는 철 지난 억새들의 부딪치는 소리가 있다. 그들이 가쁘게 내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탬버린을 손에 쥔 듯하다. 부엉이가 제짝을 찾는 소리 들리는데 이것은 실로폰의 소리다. 수명을 다한 낙엽은 드럼을 치며 어디론가 굴러 간다. 그것은 봄이 오고 있는 희망의 길목으로 가는 것이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도 여러 가지 악기가 어우러진 연주회장을 떠올리게 한다. 독주회가 열리기도 하고 현악 4중주가 되기도 하며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이 있기도 하다. 때로는 슬픔으로 끌고 가기도 하고 희열의 순간을 만끽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크기가 다르고 각각의 소리를 내는 여러 악기들이 있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람들도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은 마찬가지로 닮아있다. 나는 오늘도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 구성원의 관객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의 연주회를 열고 있다.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 wavekts@hanmail.net

 

작성 2025.04.29 11:09 수정 2025.04.2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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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