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앙의 시대다. 정치도 재앙, 경제도 재앙이다. 코로나가 갔나 했더니 코로나만큼 강한 독감이 다시 바이러스 재앙을 몰고 왔다. 장티푸스나 콜레라, 이질, 천연두 같은 전염병들은 퇴치되었지만, 더 강력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바이러스들이 창궐해서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한다. 이럴 땐 역신을 퇴치할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 농경시대엔 마을 단위의 ‘신’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개인 단위의 맞춤형 ‘신’이 필요하다. 물론 예수나 부처처럼 최고‘의 정신적 신이 있지만, 그보다는 ‘처용’ 같은 자신만의 ‘신’이 필요한 시대다.
21세기 ‘처용’은 무엇일까. 보도듣도 못한 범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시대, 영화 시나리오보다 더 창의력이 있는 정치를 매번 보여주는 시대, 개나 줘버린 도덕은 살아오지 못하는 시대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주로 우주선이 날아가고 AI가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에 바이러스 같은 각종 빌런들에게 점령당하고 가장 작은 존재에게 인간은 점령당하고 있다. 지구는 강력한 문명을 구가하고 있는데 그 지구 안에 살고 있는 한 개인은 나약하고 어리석고 힘이 없다. 천 년 전 서라벌에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던 ‘처용’이 필요하다. ‘처용’을 불러와 보자.
ᄉᆡᄫᆞᆯ ᄇᆞᆯ긔 ᄃᆞ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ᅀᅡ 자리 보곤
가ᄅᆞ리 네히어라
둘흔 내 해엇고
둘흔 뉘 해언고
본ᄃᆡ 내 해다마ᄅᆞᆫ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
서울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해였고
둘은 뉘 해인고
본디 내 해다마는
앗은 걸 어찌할꼬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인가 보다. ‘여자는 예쁘면 다다’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통해 진리로 확인된다. 예뻐서 탈이 난 처용의 아내를 나무라야 할 것인가. 예쁜 남의 여자를 탐한 그놈을 요절내야 할 것인가. 인간적인 면에서 보자면 두 연놈을 다 작살내는 것이 대다수다. 둘 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면 예수나 부처처럼 급이 높은 사람이고 아내를 용서하면 원래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놈이라고 욕먹을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찌질하고 밴댕이 속알딱지 같은 존재다. 그렇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런데 우리의 슈퍼스타 ‘처용’은 달랐다. 슈퍼스타가 되려면 남들과 달라야 한다. 인간에게 없는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슈퍼스타가 된다. 비장해야 하고 특별해야 하고 문제해결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슈퍼스타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둔 처용은 서라벌에서 노닐다가 늦은 밤에 늦게 귀가해서 방문을 열어 보니 이불 밑에 발이 네 개가 보였다. 놀라서 가만히 보니 아내가 낯선 남자와 동침하고 있었다. 처용은 이 광경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서울 밝은 달에
밤늦게 노니다가
들어서야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이요
본디는 내 것이다마는
앗은 것을 어찌할꼬
처용의 아내와 잠자리를 가졌던 남자는 ‘역신’이다. 역신은 일종의 바이러스 질병이다. 신라에 역신이 있었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정신적 타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이 미친 정치로 타락하고 경제사범으로 타락하고 마약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천 년 전 신라의 현자들은 끊임없이 정신적 타락에 대해 경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고를 경고로 듣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슈퍼스타 처용은 달랐다. 잘못된 사회를 제대로 인식한 것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범하는 ‘역신’을 아작내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며 스스로 잘못을 뉘우칠 수 있게 전도했다. 아내도 계몽하고 역신도 계몽한 것이다. 이에 감동한 역신은 앞으로 처용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집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맹세하고 떠났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우리의 슈퍼스타 ‘처용’의 얼굴을 문 앞에 그려서 붙여놓고 역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처용은 단박에 슈퍼스타가 되어 오늘날까지 문화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역신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다. 먹방이 대세 콘텐츠가 되고 비트코인으로 벼락부자가 되며 부정선거로 곤욕을 치르는 정치권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권모술수면 다 이루는 사람들의 도덕은 애초에 없는 듯하다. 문제는 너무 많은데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는 시대에 살며 AI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 회사도 잘 다니고 돈도 저축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은지 따지지도 않는다. 21세 처용은 우리게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올까. 마냥 기다려야 할까. 아니다. 당신이 바로 ‘처용’일 수 있다. 당신이 바로 우리의 슈퍼스타일 수 있다. 당신을 기다리는 우리를 위해 ‘처용’의 얼굴로 어서 오라.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