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반드시 죽을 거야’, ‘반드시 죽으리라’로 이어지는 두 번의 죽음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지난주, 그 두 번째 칼럼이 발표되고 난 뒤, 몇 시간이 흐르지도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듣기 싫다’, ‘보기 싫다’ 등 대놓고, 노골적으로 부정의 의사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리다가 또 하나의 칼럼으로 대답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올해는 서기 2025년, 불기 2569년, 단기 4358년이고, 니체의 시간 계산법으로는 137년입니다. 서기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맞물린 서양의 시간 계산법이고, 단기는 고조선을 세운 단군이 즉위한 기원전 2333년을 기준으로 하는 연호이며, 니체의 시간 계산법은 그가 《안티크리스트》를 마감하면서 1888년 9월 30일을 1일로 선포한 것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문제는 기준입니다.
한 병사가 ‘기준!’ 하고 외치면, 모든 병사들은 그 기준을 중심으로 하여 순식간에 새로운 줄을 형성해 냅니다.
죽음은 듣기 싫고, 삶은 보기 좋습니다.
죽음, 또 죽음, ‘반드시 죽을 거야’, 또 ‘반드시 죽으리라’, 이런 말을 계속 듣다보면 반감이 솟구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삶은 그런 반감으로 더 나아지지 않습니다.
기준은 정하기 나름입니다.
기준은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기준에 얽매여 다른 모든 것을 함부로 평가하고 폄하하는 행위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라고 말하면서 특정 종교의 이념과 교리에 얽매여 있는 사고방식으로는 화해나 통합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물론 기준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닙니다.
기준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시각도 변해야 하듯이, 그렇게 세월 따라 변해가는 그 순리에 맞춰서 세상을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사-알-암 하고 천천히 발음하다보면 삶의 이념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게 있습니다.
지난주에 한국산문 작가협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의를 했습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두 시간 동안 함께 읽었습니다. 세기말, 세기 전환기, 집안싸움으로 집안을 말아먹던 그 당시 유럽의 정서를 알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1차, 2차, 두 번의 전쟁으로 유럽은 기세가 꺾이고, 신대륙에게 패권을 넘겨야 했습니다.
싸움은 피할 수 없지만, 적당하게 그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끝도 없이 트집 잡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데카당이 현실을 지배하게 됩니다. 일방적인 논리로 진리를 입에 담으면 퇴폐가 만연하게 됩니다. 썩어빠진 정신이 이성을 지배하고, 몰상식이 정상을 지배하면 판단 자체가 흐려지고 맙니다. 뜬 눈으로도 사물을 보지 못하는 지경이 펼쳐집니다.
물론 적당할 때 그쳐도 잃은 것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전체가 함께 몰락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꿈과 희망을 쫓았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인정하고, 싫어도 바라봐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죽음? 괜찮습니다. 아직 살아 있으니 죽음도 문제가 될 뿐입니다.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삶을 사랑하며 치열하게 살아주면 됩니다.
공자의 명언 ‘조문도 석사가의’를 직역하면 ‘길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가 됩니다.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줄여서 ‘관음’이라고도 합니다. 말을 그대로 옮겨 번역하면 ‘소리를 본다’는 것입니다.
길은 봐야 하는데 들으라 하고, 소리는 들어야 하는데 보라 합니다. 이런 모순이 전환과 반전의 의미로 실현되는 곳이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너는 살아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앞선 말의 화살에 꽂혀서 옴짝달싹하지 못합니다. 뒤따르는 말의 빛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릴케는 ‘보라, 즐겨라, 사랑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말이 심반조되어, 마음의 거울에 비춰보기를 반복하다보면, 뭔가 다르게 들리고 보이는 게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