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정유재란 시기 조선에 파병된 계금 휘하 명 수군의 행적 ​

윤헌식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강화 교섭은 몇 가지 교섭 조건에 관한 문제가 서로 의견이 갈리면서 시간을 끌다가 1596년에 이르러 결렬되었다. 그 결과 명의 조정에서는 강화를 주장하던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탄핵당하고, 강화를 반대하는 언론이 조성되었다. 강화 반대 언론의 조성은 조선의 외교가 영향을 미친 결과이기도 하다.

전쟁의 재발할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명의 황제 만력제는 1597년 2월경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여 조선으로 파병하는 계획을 승인하였다. 1597년 6월경 명은 파병될 병력에 수군도 포함하기로 하였는데, 다음 달 7월에 칠천량해전이 발발하자 수군 파병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군대를 다른 나라로 파병하는 것은 막대한 물자와 시간이 소모되는 일이므로 명의 조선 파병은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명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경략 형개(邢玠)가 만력제에게 보고한 글을 모은 책인 『경략어왜주의』에는 정유재란 시기 명의 군사 전략이 잘 나타나 있다. 최근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명나라의 정유전쟁』이라는 책이 발간되어 정유재란 시기 명의 군사 전략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경략어왜주의』에 따르면 명 조정은 1597년 9월까지 수병 21,000명을 징발하고, 이 병력이 명의 여순(旅順), 천진(天津)과 조선의 강화(江華) 등에 순차적으로 배치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경략어왜주의』에 조선의 강화도가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명이 조선의 군사적 주요 거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명 수군의 파병 결과로 1597년 10월경 명의 수군 장수 계금(季金)이 이끄는 수병 3,000여 명이 수병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선에 도착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이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24일

 

초경(밤 7~9시)에 선전관 하응서가 유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바로 우후 이몽구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그 편에 “명 수군이 강화도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문] 初更 宣傳官河應瑞持有旨入來 則乃虞候李夢龜行刑事. 因聞唐舟師到江華云.

위 『난중일기』의 기록은 계금 휘하 명 수군의 목적지를 『경략어왜주의』와 마찬가지로 강화도로 언급하고 있다. 『선조실록』의 같은 달 기사(권93, 선조 30년 10월 23일 경진 2번째 기사)에도 명 수병의 도착지를 강화도로 언급한 내용이 나타난다. 계금이 거느리고 온 수병의 숫자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꽤 많은데,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3,000명, 3,200명, 3,300명 가운데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계금은 절강 출신으로서 그의 병력 또한 주로 절강과 남직례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의 파병 소식은 일찍이 1597년 3월 조선 조정에 알려졌다. 1597년 9월경 형개가 만력제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절강 수병 3,000명이 여순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고 하였는데, 당시 정황으로 보아 계금 휘하 병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계금의 병력은 1597년 2월 명의 파병 계획이 승인된 직후 곧바로 파병되어 여순에 머물다가 1597년 10월경 조선으로 들어온 것으로 판단된다.

계금은 1597년 11월경 충청수영이 있던 오천으로 들어간 다음 12월경 일부 군사를 오천에 남겨두고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남원에 주둔하였다. 이후 1598년 초 사로병진작전 계획이 확립된 뒤 계금은 1598년 4월 고금도로 이동하여 통제사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과 합류하였다. 1598년 7월 명의 수군 도독 진린까지 합류하면서, 조명연합수군이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후 조명연합수군이 벌인 왜교성 전투나 노량해전은 많은 분이 잘 아시는 역사적 사건이다. 참고로 충청수영이 있던 지금의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는 1598년 4월에 세워진 계금의 청덕비가 남아있다.

보령 유격장군 청덕비(계금 청덕비) - 자료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조선시대 시인이자 문인으로 유명한 옥봉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의 아들 백진남(白振南, 1564~1618)이 정유재란 시기 통제사 이순신 진중에 피난해 있으면서 계금과 교류했던 사실이 최근 언론의 조명을 받은 일이 있다. 백진남의 자는 선명(善鳴), 본관은 해미(海美)로서 그의 이름이 1597년 『난중일기』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최근에 소개된 한효순(韓孝純, 1543~1621)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충무공의 1598년 7월 8일 친필 편지(「중앙일보」, 2012년 5월 10일)에서 백진남으로 추정되는 백 진사(白進士)라는 인물과 계금의 교류가 확인된다. 또한 백진남의 문집 『송호집』에는 「추별계야어우영차기운(追別季爺於右營次其韻)」이라는 제목으로 계금과의 작별을 주제로 한 시가 실려있다.

정유재란 시기 조선에 파견된 계금 휘하 명 수군의 군사 활동은 많은 관련 사료가 현전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다룬 논문(「임진왜란 시기 명 수장 계금의 군사 행적 고찰전」, 박현규, 2014)도 있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에 관한 정보를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형개, 『명나라의 정유전쟁』, 사회평론아카데미, 2024

한명기, 「정유재란 시기 명 수군의 참전과 조명연합작전」, 『군사』 38,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1999

첸샹솅(陈尙胜), 「정유재란시 명군의 전략과 조·명연합작전의 변화」, 『한중일공동연구 정유재란사』, 범우사, 2018

박현규, 「임진왜란 시기 명 수장 계금의 군사 행적 고찰전」, 『이순신연구논총』 21,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4

국립중앙도서관, 백진남(白振南), 『송호집(松湖集)』 권2, 「추별계야어우영차기운(追別季爺於右營次其韻)」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5.05.16 10:00 수정 2025.05.1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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