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명량해전 직후 충무공 이순신의 포상 논의 ​

정유재란 시기에 벌어진 명량해전(1597년 9월 16일) 직후 조선 조정은 군공을 세운 장수들을 포상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11월 16일

 

군공을 정한 기록을 살펴보니 거제현령 안위가 통정이 되었고 그 나머지 (장수들도) 차례로 관직을 제수받았으며, 나에게는 상으로 은자 20냥을 보냈다. 명나라 장수 양 경리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붉은 비단을 배에 걸어 주고 싶지만 멀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원문] 軍功磨鍊記相考 則巨濟縣令安衛 爲通政 其餘次次除職 而賞銀子卄兩 送于吾處. 唐將楊經理 致紅段一匹曰 欲掛紅於船 而遠不能爲云.

 

통정(通政): 정3품 품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말한다. 양 경리: 명나라에서 파병된 장수 양호(楊鎬)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제1차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훗날 1619년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벌어진 사르후 전투에서 총지휘관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하여 해임당한 후 처형되었다.

위 기록을 살펴보면, 통제사 이순신 휘하 여러 장수들이 명량해전 군공의 포상으로 주로 관직을 제수받았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660호 「최희량임란관련고문서」 가운데에는 군공을 포상하기 위해 1597년 10월 25일에 발급된 교지가 있는데, 그 발급 시기를 고려하면 위 『난중일기』 기록과 관련 있는 교지로 생각된다.

여러 장수들이 관직을 제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휘관이었던 통제사 이순신은 은자 20냥에 불과한 포상이 내려왔다. 오히려 명나라 경리 양호가 보낸 비단과 축하의 말이 훨씬 더 성의가 있어 보인다. 필자의 개인적인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위 『난중일기』의 내용을 반복해서 읽어보면 당시 충무공의 심정이 엿보이는 기분이 든다.

조정에서 명량해전의 군공에 대한 포상이 결정되기 전에, 충무공 이순신에게 품계를 올려주자는 논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난중일기』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11월 11일

 

신임 평산포 만호의 도임장이 올라왔는데, 바로 하동현감의 형인 신훤이었다. “숭정대부를 상으로 가자한다는 (명이) 이미 나왔다.”라는 말도 전했다.

 

[원문] 平山新萬戶到任狀進呈 乃河東兄申萱也. 傳言崇政賞加已出云.

위 기록에 언급된 숭정대부(崇政大夫)는 종1품 품계이다. 충무공은 1592년 한산도해전 이후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이후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그대로 정헌대부에 머물러 있었다. 즉, 숭정대부로 품계를 올리는 포상은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로 충무공이 정헌대부의 품계를 받은 일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선조수정실록』의 기사(26권, 선조25년-1592년 7월1일 무오 9번째 기사), 이항복의 『백사집』에 수록된 「고통제사이공유사」,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수정헌대부교서」 등이 그러한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정경운의 『고대일록』의 1598년 11월 19일 일기에도 충무공을 숭정대부로 언급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이 전사한 일을 언급하면서 그의 관직을 '숭정대부 전라좌수사 겸통제사(崇政大夫全羅左水使兼統制使)'로 서술하였다. 아마도 충무공을 숭정대부 품계로 올려준다는 소문이 일찍부터 널리 퍼졌던 것 같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행록」에도 숭정대부와 관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록」에 따르면, 명량해전 직후 충무공에게 숭정대부를 포상하려고 했지만 이미 충무공의 품계가 높기 때문에 일(전쟁)이 다 끝난 뒤에는 포상할 방법이 없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포상의 방법이 품계를 올려주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므로 「행록」에 기록된 조정의 논의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논리이다. 또한 「행록」을 살펴보면 명나라 경리 양호가 충무공에게 붉은 비단과 은자를 보내어 명량해전의 전공을 표창한다는 내용도 보이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위 『난중일기』, 1597년 11월 16일에 언급된 은자 20냥도 조선 조정이 내린 포상이 아닌 셈이다.

『선조실록』의 기사(99권, 선조31년-1598년 4월 15일 기사 3번째 기사)에 따르면, 1598년 4월 조정은 다시 한번 충무공의 포상을 논의했지만, 선조는 충무공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명량해전 직후 숭정대부 포상이 무산된 것도 아마 마찬가지 이유 때문으로 생각된다. 전공을 포상하는 일의 당위성은 논의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정치적인 이유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이든 선조의 행위는 한심한 작태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 이후 1598년 12월 4일자로 우의정 증직교지가 내려졌다. 이 교지는 당시 충무공의 관직을 ‘정헌대부 행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통제사(正憲大夫行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統制使)’로 서술하였는데, 이를 통해 충무공이 노량해전 때까지 정헌대부 품계를 유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우의정 증직교지가 최근까지 유물로 내려오다가 1969년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져서 도난문화재로 지정된 일이 발생하였다. 이는 상당히 유명한 사건으로서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해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라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소개하고 넘어가려 한다. 다음은 1928년에 촬영한 이순신 우의정 증직교지의 사진이다.

 

이순신 우의정 증직교지 - 자료 출처: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제660호 「최희량임란관련고문서(崔希亮壬亂關聯古文書)」

한국고전종합DB, 이항복(李恒福)의 『백사집(白沙集)』 권4,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

한국고전종합DB,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수정헌대부교서(授正憲大夫敎書)」/「행록(行錄)」

한국고전종합DB,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5.06.13 10:20 수정 2025.06.1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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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