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지 참외가 나올 철이 되었다. 비닐하우스 참외는 시도 때도 없이 나오지만, 제철 노지 참외는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쯤 나온다. 보리타작을 해서 알곡을 볕에 말리고 있을 때 참외 장수가 오면 아버지 몰래 보리를 퍼주고 참외를 바꾸어 먹던 기억이 새롭다. 약 50년 전 시골에는 이런 물물교환 경제가 작동했다. 그래서 공짜를 바라지 말라는 뜻으로 "보리 주면 외 안 줄까?"라는 속담이 있었다.
오이의 준말이라고 할 수 있는 '외'는 두 종류가 있다. 참외와 물외가 그것이다. 과일처럼 먹는 것이 참외이고 미역냉국이나 오이무침을 해서 반찬으로 먹는 것을 물외라고 했다. 오이의 성분이 대부분 물이니까 물외라고 했던 것 같다. 장마 통에 잘 자라는 것은 죽순과 물외다. 그래서 우후죽순이란 말과 함께 "장마 통에 물외 크듯 한다"는 속담도 생겨났다.
옛사람들은 오이의 씨앗도 예사로 보지 않았다. 늙은 오이가 누렇게 익으면 잘 관리해서 씨통으로 만들었다. 씨통에서 뽑아낸 외씨를 말려 잘 보관했다가 이듬해 다시 파종을 했다. 이때 예리한 관찰력이 있는 사람은 외씨가 보선처럼 생긴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아니 보선이 외씨를 본떠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조지훈은 그의 시 승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밭두렁이나 돌담 사이로 맛물이 터질 때까지 비가 내려야 장마라고 했다. 부엌의 불 때는 아궁이에서도 맛물이 터져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를 기다리는 작물이 물외다. 참외도 어느 정도 수분이 있어야 잘 자라지만 노랗게 익을 때 비가 많이 오면 당도가 많이 떨어져 맛이 덜하다. 그러나 물외는 시원한 물맛만 있으면 되니 장마가 길어져도 문제없이 자란다.
타작마당의 보리를 퍼주고 참외를 바꿔 먹던 추억도 이제는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기능성 양말이 널린 요즘 세상에 누가 외씨보선을 신겠는가. 장마 통에 쑥쑥 자라는 물외를 보고 좋아하시던 할머니도 하늘로 가시고, 외는 이제 사라져 가는 그리운 우리말로 남았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