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긴 또 어드메냐
목이 마르다
- 김종삼, <형(刑)> 부분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의 서두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탄식한다.
“아, 나는 이제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마침내 신학까지도 열심히 애써서 연구를 마쳤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가엾은 바보 꼴이라니!”
그는 온갖 학문을 탐구했지만, 그가 얻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파우스트가 자살을 결심하고 약을 손에 쥐었을 때, 창밖에서 부활절 합창이 들려왔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 음성은 내 마음의 문을 다시 두드린다. 나는 다시 인간 속으로,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는 철학, 법학, 의학, 마침내 신학까지도 섭렵했다. 그의 끝없는 배움의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적 쾌감의 끝은 어디인가? 절망, 자살이 아닌가? 키르케고르는 미(美)적 단계를 실존의 가장 낮은 단계로 봤다.
배움의 쾌감도 다른 미적 쾌감과 같은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절망은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살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배우는 쾌감이 아니라, 진리를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배움은 ‘인간 속으로, 삶 속으로’ 침투하여 진리의 꽃을 피워야 한다. 진흙에서 연꽃을 피워야 한다. 우리 주변에 보면, 인문학 공부 모임, 고전 읽기 모임이 상당히 많다.
우리는 이런 공부 모임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지적 쾌락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지적 쾌락을 높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든 쾌락의 끝은 형(刑)이다.
여긴 또 어드메냐
목이 마르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