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당항포해전은 임진왜란 강화교섭 시기인 1594년 음력 3월에 벌어진 전투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벌어진 다른 유명한 해전인 사천해전,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에 비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전투이다. 아마 다른 전투에 종종 등장하는 극적인 장면이 제2차 당항포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별로 없기 때문인 듯하다. 또한 비교적 군사적·정치적 긴박감이 떨어지는 강화교섭 상황에서 벌어진 해전이라는 점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제2차 당항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전략·전술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전투이다. 당시 조선 조정이 한산도에 조선 수군을 집결하여 견내량을 중심으로 바닷길을 방어한 이유를 다시 한번 명확히 확인해준 해전이기 때문이다. 본 칼럼은 제2차 당항포해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전투 경과 및 이 해전이 갖는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임진왜란 강화교섭 시기인 1593년 조선 조정은 한산도에 전라도·충청도·경상도 3도 수군을 모아 일본군이 서쪽으로 나아가는 바닷길을 차단하였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한산도는 일본군의 바다 침략을 막는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또한 조선 조정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새로운 직책인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시켜 조선 수군의 통솔 체계를 견고히 하였다.
1594년으로 접어들어 강화교섭이 계속 진행되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서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강화교섭에서 유리한 입장을 점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조선의 영토를 점령할 목적으로 벌인 군사적 움직임이었다. 강화교섭 시기 일본 측이 제시한 조건 가운데 하나가 조선 남부 4도를 할양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한다면, 1594년 일본군의 서진 움직임이 가지는 목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1594년 1월 거제도에 주둔한 일본군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 육지의 땅인 진해·함안 등지를 침범하고 있다는 보고가 조정에 도착하였다. 또한 거제도 등지의 일본군이 많은 목재를 벌채하는 점으로 보아 많은 선박을 건조하여 수륙으로 공격하려는 계획임이 틀림없다는 보고도 조정으로 올라갔다. 이러한 이유로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전라도로 침범하려는 일본군을 섬멸하라는 내용의 유지를 내렸다. 즉,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목적을 전라도 침범으로 파악한 것이다.
약 1개월 후인 2월로 접어들면서 일본군의 서진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2월 7일에는 왜선 50여 척이 춘원포(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황리·안정리 일대)에 이르렀으며, 2월 8일에는 왜선 50여 척이 고성 소소포(지금의 고성군 고성읍 죽계리 평계 마을)에 드나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2월 12일에는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일본군의 목적이 전라도에 있다고 알리며, 상황을 보아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월 중후반에는 왜선이 춘원포나 구허역(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노산리)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왜선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던 통제사 이순신은 3월 3일 왜선 대·중·소 선박 총 31척이 고성과 진해 등지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수군을 출동시킴으로써 제2차 당항포해전이 시작되었다.
제2차 당항포해전의 전투 경과는 ‘이충무공전서’의 「당항포파왜병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3월 3일 오후 2시경 고성의 벽방(통영시 광도면 황리 벽방산)에서 망을 보던 장수 제한국이 급보를 보내어 “3월 3일 날이 밝을 무렵 왜의 대선 10척, 중선 14척, 소선 7척이 영등포(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구영 마을)에서 출발하여 21척은 고성땅 당항포(지금의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로, 7척은 진해땅 오리량으로, 3척은 저도(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 저도)로 향했다.”라고 보고하였다. 곧바로 통제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에게 전령을 보내었으며, 순찰사 이빈에게는 육지에서 호응해 달라는 내용으로 공문을 보냈다. 그날 밤 8시경 3도의 조선 수군은 모두 한산도에서 출발하여 밤 10시경 거제현의 지도(지금의 통영시 용남면 지도리) 바다에 도착하여 밤을 지냈다.
3월 4일 새벽 통제사 이순신은 전선 20척을 견내량에 머물러 두어 한산도 방향으로 가는 남쪽 바닷길을 막은 다음, 가볍고 정예한 선박과 31명의 장수를 뽑아서 조방장 어영담을 인솔 장수로 삼아 당항포와 오리량 등 왜선이 정박한 곳으로 급히 들여보냈다. 어영담이 휘하 장수의 숫자로 보아 그가 이끌던 선박의 규모는 전선 30여 척으로 생각된다. 통제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나머지 전선을 이끌고 영등포와 장문포(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장문포구)의 적진 앞바다에 있는 증도(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 실리도 속칭 시리섬) 부근에서 학익진을 펼쳐 동쪽 바닷길을 차단하였다.
영등포와 장문포는 당시 영등포왜성과 장문포왜성 등이 설치되어 일본군의 군사적 거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증도 부근 바닷길을 차단한 것은 고성 당항포와 진해 오리량 등으로 들어간 왜선의 퇴로를 막고 또한 동쪽의 바깥 바닷길을 통해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는 일본군의 지원군을 저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때 증도 부근 바닷길을 차단한 조선 수군 전선의 규모는 약 80척으로 추정된다.

조방장 어영담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진해 선창(鎭海船滄)으로부터 나와 기슭을 따라가는 왜선 10척을 발견하고 한꺼번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진해 읍전포(邑前浦)에 6척, 고성 어선포(於善浦)에 2척, 진해 시구질포(柴仇叱浦)에 2척을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으며, 조선 수군은 그 남겨진 배를 모두 불태웠다. 당항포에 들어가 정박한 왜선 21척에 있던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불태운 왜선에서 나는 연기와 불꽃을 바라보고는 사기가 떨어져 육지에 올라가 진을 쳤다. 통제사 이순신은 순찰사 이빈에게 육군의 호응을 독촉하는 공문을 보내고, 조방장 어영담에게는 그의 휘하 조선 수군과 함께 당항포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미 썰물이 나가고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어영담 휘하 조선 수군은 당항포 포구를 막고 밤을 지냈다.
3월 5일 새벽 통제사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은 다시 큰 바다에서 진을 쳐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고, 조방장 어영담 휘하 조선 수군은 당항포로 들어갔다. 이날 오후 2시경 어영담은 급보를 보내 일본군은 모두 도망가고 기와와 왕죽(王竹)을 가득 싣고 정박해 있던 왜선 21척을 모두 불태웠다고 보고하였다. 왜선을 모두 불태운 조선 수군은 이후 모두 모여 바다에서 포성을 울리며 위세를 보임으로써 그 바다 주변의 영등포, 장문포, 제포, 안골포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조선 수군의 기세를 과시하였다. 전투를 마친 조선 수군은 3월 6일 배를 출발하여, 다음날 3월 7일 한산도 진영으로 돌아와 제2차 당항포해전을 종료하였다.
제2차 당항포해전 시기 전투가 벌어진 전장의 주변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조선 수군이 뛰어난 전략·전술을 바탕으로 전투를 이끈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제2차 당항포해전이 벌어진 진해만은 경남 창원시·고성군·통영시·거제시 사이 위치한 바다로서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이 많은 활약을 펼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부산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따라 전라도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임진왜란 시기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진해만 일대에서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던 점도 이를 증명한다.
진해만 한가운데 위치한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광이도(대광이도와 소광이도를 함께 부르는 지명) 주변 바다는 속칭 ‘괭이바다’라고 불린다. 이 일대 주민들이 광이도를 ‘괭이섬’으로 부르기 때문인데, 이는 공식 지명은 아니다. 임진왜란 시기 괭이바다 주변은 남쪽과 동쪽에 거제현(지금의 거제시)이 있었고, 서쪽에 고성현(지금의 고성군·통영시)이 있었으며, 북쪽에 진해현(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북면·진전면)과 구산현(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이 있었다. 바깥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바닷길은 남쪽의 견내량과 동쪽의 구산현 앞바다밖에 없으므로 이 두 곳만 봉쇄하면 괭이바다로 들어온 적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지형이다.
제2차 당항포해전 시기 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왜선이 괭이바다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바깥 바다로 이어지는 두 곳의 바닷길을 막은 다음 왜선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서 이를 모두 소탕했다. 전장의 주변 지리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뛰어난 전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 시기 한산도에 주둔한 조선 수군의 활동 반경을 견내량 남쪽으로 한정하여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제2차 당항포해전의 군사 작전 지역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 수군이 한산도를 거점으로 삼아 견내량 북쪽 괭이바다까지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괭이바다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에게는 군사 작전을 펼치기 위한 앞마당과 같은 곳이었으며, 일본군에게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어려운 사지(死地)와 같은 곳이었다.
다음 칼럼부터는 제2차 당항포해전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었던 진해 선창(鎭海船滄), 읍전포(邑前浦), 시구질포(柴仇叱浦), 오리량(吾里梁), 어선포(於善浦)의 위치를 여러 차례에 걸쳐 살펴볼 것이다. 노산 이은상은 1960년에 ‘이충무공전서’ 번역서를 출간하면서 이들 지명의 위치에 관해 주석을 달았지만, 그 내용에는 여러 가지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출간된 제2차 당항포해전 관련 연구 자료들이 이은상의 주석을 아무런 검토나 비판 없이 거의 그대로 인용하여 잘못이 계속 답습되고 있으므로 이를 조금이라도 바로 잡고자 한다.
- 본 칼럼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의 ‘동방학지’ 제210집(2025년 출간)에 수록된 논문 「제2차 당항포해전지의 위치 고찰」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이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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