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 칼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나주목사 남유

윤헌식

많은 분들께서 아시다시피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다. 조명연합수군이 일본군 함대와 노량에서 1598년 11월 19일(음력) 새벽에 매우 치열한 전투를 벌여 왜선 300여 척을 침몰시킨 해전이었다. 

 

이 전투는 양측의 대규모 선단이 정면충돌하여 벌어진 큰 규모의 전투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명의 장수가 전사할 정도로 인적 손실이 있었다. 명확한 기록을 찾기 어려워 정확한 규모는 알 수는 없지만 휘하의 군사들도 다수 전사했거나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 장수는 우선 전투 직후 『선조실록』 기사에 언급되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선조실록』 권106, 선조31년-1598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 기사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원문) 統制使李舜臣 及加里浦僉使李英男 樂安郡守方德龍 興陽縣監高得蔣等 十人中丸致死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사이트를 검색해서 위 『선조실록』 기사의 번역 내용을 살펴보면, 전사 장수를 '10여 명'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하지만 원문은 '十人'으로 되어 있으므로 '10여 명'이 아닌 '10명'이 정확한 인원이다.

 

​『선조실록』에 언급된 10명의 전사 장수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서술된 기록이 있다. 손기양(孫起陽, 1559~1617년)의 문집인 『오한집』에는 그가 임진왜란 시기에 쓴 일기 가운데 1598~1599년 분량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노량해전 전사 장수 명단이 실려있다. 당대의 기록이므로 신빙성이 높아 보여 주목해야 할 자료이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손기양, 『오한집』 권4, 「일록」

 

무술년(1598년) 12월 3일 이방(李芳)이 도원수(권율)이 있는 곳에서 와서 전사자에 관해 말하였다. 통제사 이순신, 흥양현감 고덕장(高德章: 高得蔣의 오기), 가리포첨사 이영남이 그들이며, 낙안군수, 함평현감, 거제현령, 이진권관, 서천만호, 경상우수영 우후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주목사(○州牧使) 남유(南維), 전라우수사 안위는 총탄에 맞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오한집』에 실린 전사 장수 명단은 『선조실록』의 기사에 실린 것보다 훨씬 자세하다. 단 『오한집』에 기록된 전사자는 총 9명으로서 『선조실록』의 기사보다 1명이 적다. 『오한집』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전자사 명단은 도원수 권율 진영으로부터 나온 정보로 생각되므로 꽤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오한집』의 명단 중에 보이는 통제사, 가리포첨사, 흥양현감, 낙안군수는 『선조실록』의 기사에도 나오므로 『오한집』의 신빙성을 더더욱 높여준다. 명량해전 시기 거제현령으로서 활약한 안위가 노량해전 때 총탄에 맞았다는 기록이 나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오한집』에는 '○주목사 남유(南維)'라는 인물이 언급되어 있다. 제일 앞 글자는 본래 사료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빈칸으로 남겨진 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람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당시 정3품 품계의 목사 벼슬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주군읍지』의 「선생안」에 따르면 나주목사 남유(南瑜)라는 인물이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나주목사 남유는 1598년 8월 3일에 나주목사로 도임하였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도 그의 관직과 이름 '목사(牧使) 남유(南瑜)'가 수록되어 있다. 『오한집』에 기록된 남유의 이름 '南維'는 '南瑜'의 오기라고 할 수 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 1576~1627년)이 바로 남유의 아들이다. 허목(許穆, 1595~1682년)의 문집 『미수기언별집』에는 남유의 아들 남이흥(南以興)의 묘비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남이흥의 아버지가 1598년 전투(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언급이 보인다. 현재 남이흥의 유품이 현전하여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남이흥장군일가유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유와 남이흥 부자가 모두 역사에 기록될 충신인 셈이다.

 

​남유의 자는 시망(時望), 본관은 의령(宜寧), 생몰년은 1552~1598년이다. 현재 남유의 묘는 그의 아들 남이흥 부부의 묘와 함께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으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1724년에 세워진 묘비가 있는데, 묘비에 세워진 글자와 번역 내용 등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남유묘비(南瑜墓碑)'라는 제목의 저작물로 일반에 제공하고 있다.

 

남유, 남이흥 묘역 전경 -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남유의 묘비에 따르면, 나주목사 남유는 노량해전(11월 19일)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3일 뒤 11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손기양의 『오한집』은 남유가 총탄에 맞고 전사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하였는데, 남유가 부상을 당한 뒤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의 정보가 손기양에게 도달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유의 전사 사실을 고려하면, 『오한집』에 기록된 노량해전 전사 장수는 총 10명이 된다. 이는 위 『선조실록』의 기사에 나타난 전사 장수 10명과 일치한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손기양(孫起陽), 『오한집(聱漢集)』 권4, 「일록(日錄)」

한국고전종합DB, 허목(許穆), 『미수기언별집(眉叟記言別集)』 권23, 「구묘문(丘墓文)」-「의춘군비(宜春君碑)」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나주군읍지(羅州郡邑誌)』, 「선생안(先生案)」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남유묘비(南瑜墓碑)」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5.07.25 10:05 수정 2025.07.2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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