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용 칼럼] 디카시의 이론적 한계와 상상력의 층위 (2)

신기용

Ⅲ. 정동 이론과 디카시

 

1. 정동 이론 이해

 

가. 스피노자의 정동(Affectus)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에티카』에서 “나는 정서(이 책에서는 정동을 정서로 번역)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라고 강조했다. 정동(Affectus)을 감정, 욕망,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된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로 정의한다. 그의 정동은 능력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즉, 정동은 어떤 주체가 자신의 능력이나 행위의 범위를 확장하거나 축소하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정동의 역동성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에게 정동은 내적 힘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나의 능력을 확장시키면, 기쁨을 느끼고, 반대로 능력이 축소되면 슬픔을 경험한다. 이 변화는 생명력의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이론적 적용 측면에서 보면, 시나 문학적 표현에서, 정동은 독자에게 감정적인 충격이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문학적 표현은 주체의 능력 변화를 이끌어 내고, 독자는 그 변화를 통해 새로운 시각이나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나. 마수미의 감정과 정동(Emotions and Affects)

마수미(Brian Massumi, 1956~ )는 『가상계』에서 감정과 정동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정동은 그동안 자주 정서(emotions, 이 책에서는 정서로 번역)와 동의어로 아무렇게나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 명료한 교훈 하나는 정서(감정)와 정동(정동이 강렬함이라면)이 서로 다른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며,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한다.”라고 보았다.

 

“정서(감정)는 주관적 내용으로, 경험의 질을 사회언어학적으로 고정하는 것”이고, “정동이란, 실제적인 측면에서 보이는, 그 지각과 인식에 잠재해 있는, 그러한 양-측면이다.”라고 강조했다. 

 

감정은 주관적이고, 상징적이고, 내러티브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 반면에 정동은 보다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신체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마수미는 정동을 특정한 상황에서 감각적으로 불러일으켜지는 반응적이라고 본다. 또한, 상징적 해석 없이 몸으로 느끼는 것으로 설명한다.

 

몸과의 연결 측면에서 보면, 정동은 신체적 상태의 변화를 통해 나타난다. 즉, 마음의 상태가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예를 들어, 긴장감이나 두려움, 기쁨과 같은 감정은 신체적인 변화(심박수 증가, 손끝 떨림 등)로 나타난다. 이론적 적용 측면에서 보면, 이 관점에서 보면, 문학적 혹은 예술적 표현에서 정동은 비언어적이고 비합리적인 감각적 요소들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 독자는 그 감각적 변화를 통해 자신을 해석하거나, 자아의 변화를 경험한다.

 

다. 톰킨스의 정동 이론(Tomkins’ Affect Theory)

연구 심리학자 톰킨스(Silvan Solomon Tomkins, 1911~1991)에게 정동은 “신체 요동들(drives)을 추진시키는 제일의 ‘관심’ 동기부여자”이다. 정동이 인간 행동과 경험의 핵심적인 원동력이라 주장한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밀접하게 연관된 정동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감정을 다섯 가지 기본적인 정동(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놀람)으로 분류했다. 정동의 과잉 반응을 통해 개인의 경험을 탐구하려 했다.

 

정동의 사회적 역할 측면에서 보면, 톰킨스는 정동이 개인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기쁨은 타인과의 연결을 증진시키고, 두려움은 위협을 차단하거나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이론적 적용 측면에서 보면, 문학에서 정동은 독자와의 상호 작용을 촉진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예를 들어, 기쁨이나 슬픔을 다루는 시나 이야기는 독자가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들 수 있다.

 

2. 정동과 문학적 적용

위의 철학적·심리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정동은 문학에서 주체의 감정과 몸의 반응, 사회적 상호 작용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정동적 반응은 독자가 감정적 변화를 경험하는 과정을 선도한다. 이는 시나 소설 등의 문학 장르에서 생동감 넘치는 경험을 제공한다.

 

문학의 정동적 효과 측면에서 보면, 문학 작품에서 정동은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 경험이나 사회적 규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전 문학에서 슬픔이나 기쁨의 표현은 특정 시대나 사회적 맥락에서 감정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동을 통한 해석학적 전환 측면에서 보면, 정동의 철학적·심리학적 접근은 독자가 작품을 감정적으로 해석하게끔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텍스트를 심리적, 사회적, 철학적 차원에서 재구성한다. 이는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도출해낼 수 있다.

 

가. 정동의 서사화: 감정의 내러티브로의 전개

정동적 순간은 본질적으로 직관적이고 순간적인 반응이다. 이를 서사적 구조로 확장하는 과정은 정동을 보다 깊고 체계적인 감정적 이야기로 풀어내는 방식이다. 서사화는 정동의 흐름을 시간적 순서로 배열하고, 이를 통해 주체의 감정적 변화를 따라가게 한다.

 

서사의 구축 측면에서 보면, 정동에서 출발한 창작은 감정의 발전적 과정을 따라 서사를 전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슬픔의 정동이 주인공에게 특정한 사건을 촉발하고, 그 사건을 통해 주인공은 점차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동은 단지 감정적 발산이 아니라, 주인공이 경험하는 심리적 변화와 내적 갈등을 통해 서사적으로 확장된다.

 

정동의 서사적 기능 측면에서 보면, 정동을 서사화하는 데 중요한 기법은 내적 독백이나 심리적 전개이다. 시나 소설에서, 주인공의 내면적 정동이 서사의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이를 통해 감정의 복잡성과 다층적 변화를 서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동이 불러일으킨 변화가 주인공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로 사회적 관계나 정체성을 형성하거나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릴 수 있다.

 

나. 정동의 시각적 상징화: 이미지와 상징을 통한 확장

정동은 감정적이고 신체적인 반응을 시각적 언어나 심상으로 상징화함으로써, 보다 추상적이고 심오한 예술적 표현으로 발전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동의 물리적 경험을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하여 관객에게 그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심상화와 상징화 측면에서 보면, 예술 작품에서 정동은 상징적 심상을 통해 구체화한다. 예를 들어, 불안의 정동은 불안정한 선이나 휘어진 형태로, 기쁨은 밝은 색깔과 활기찬 구도로, 슬픔은 차가운 색조와 고요한 배경으로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이렇게 감정적 정동을 형상화하고 비유적 이미지로 풀어내면, 정동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각적 언어로 재구성한다.

 

예술적 확장 측면에서 보면, 정동을 시각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은 예술 작품의 감각적 차원을 풍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현대 디지털 아트에서 정동적 순간을 다중 이미지나 비디오 아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장하고, 다양한 시각적 기법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다. 이는 감정의 물리적 감각을 더욱 강화하고, 관객이 그 감정을 몸으로 느끼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다. 미래 지향적 제안: 창작의 정동적 확장

정동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확장 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인터랙티브(Interactive, 상호 작용) 예술 측면에서 보면, 디지털 매체에서 관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정동적 순간을 더욱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VR(가상 현실) 또는 AR(증강 현실) 기술을 활용한 작품에서 관객은 자신의 감정을 입력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 그에 따라 작품이 실시간으로 변형하며 정동적 흐름을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는 정동을 유동적이고, 다층적인 경험으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정동 기반의 음악과 미디어 아트 측면에서 보면, 정동은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음악적 요소나 사운드 디자인에서도 확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운드 예술에서 음향을 통해 감정의 변화를 포착한다. 이를 디지털 매체와 결합하여 정동의 변화를 음악적 리듬이나 소리의 톤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정동은 감각의 복합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청각, 시각, 촉각을 아우르는 종합적 예술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정동과 인공 지능 측면에서 보면, 인공 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창작에서, 정동은 감정 인식 시스템을 통해 작품에 반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I 시인은 특정한 감정적 정동을 감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문학적 또는 시각적 창작물을 생성할 수 있다. 이는 정동을 주체적인 경험에서 기계적 생성으로 확장하는 미래적인 창작 가능성을 열어 준다.

 

라. 소결론: 정동을 넘어서

정동은 예술 창작에서 출발점으로서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다. 이를 서사화하거나 시각적 상징화하는 방식은 작품에 심리적 깊이와 감각적 복잡성을 부여한다. 미래의 창작은 기술과 감각의 결합을 통해 정동적 경험을 확장시킬 가능성을 가진다. 이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형태와 체험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러한 정동의 확장은 예술을 인간의 내적 경험뿐만 아니라, 기술적 혁신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3. 정동은 여러 감정이니까 복합적인 감정

 

가. 정동(affect)의 주요 특징 

날시를 ‘정동 이론’의 개념으로 읽어 내어 분석하였다. 창작론과 문학 이론을 접목한 시도이다. 정동(affect)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고립된 감정보다 더 복합적이고 비분화된 감정 상태를 지칭한다. 다양한 학자들이 정동을 감정(emotion)과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강조해 왔다. 날시가 정동 단계에 머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를 도식화해 본다. 

 

 

날시는 순간적 감동 포착→이미지화(디지털카메라)→언어화(시로 재현)→디카시 완성→그러나 대부분 여기서 머무름→창조적 상상력 부족 등의 일련의 흐름이 정동 단계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동을 단일 감정이 아니라 복합적·과잉적·분절적 감정의 장(場)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동은 복수의 감정이 얽히고 충돌하며 발생하는 미분화된 정서적 흐름이다.

 

나. 마수미의 시간성

감정은 해석되었기에 약해진 정동이다. 정동은 의미화되기 전, 기표화되지 않은 힘의 운동이다. 결국에는 마수미도 감정이 있은 뒤, 정동이 있다. 그렇다면 기표는 감각의 산물인가?

 

(1) 마수미의 시간성: 비선형적 발생이라는 해석

“감정은 해석되었기에 약해진 정동이다.”라는 문장은 ‘순서’가 아니라 ‘발생 방식’을 말한다. 즉, 마수미에게는 정동이 시간적으로 먼저 발생하지만, 감정으로 포착되고 나서야 인식되는 ‘지각의 뒤늦음’이 있다. 이를 그는 “backward-formed capture”, 즉 감정은 정동의 ‘사후적 고정물’이라 부른다.

 

정동은 감정보다 먼저 발생하지만, 감정이 정동을 뒤늦게 붙잡고 해석하기에 감정이 정동 ‘이후에 생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복합적 시간성 구조이다.

 

(2) 기표는 감각에서 나왔는가

기표(signifier)를 감각의 산물로 볼 것인가, 감정의 산물로 볼 것인가? 이는 ‘언어의 기원’이라는 철학적 문제로 이어진다.

 

 

 

마수미식 구조를 요약하자면, 감각이 신체에 들어와→정동으로 에너지화되고→감정으로 인지되고 해석된 후→기표로 고정된다. 즉, 기표는 감각의 직접 산물이 아니라, 감각→정동→감정이라는 흐름을 거쳐 사회적 언어 체계에 의해 ‘붙들린 결과’이다.

그 예는 아래와 같다.

 

[감각] = 불씨  

[정동] = 불길(확산, 미분화된 열기)  

[감정] = 불의 모양(사회가 해석 가능하게 만든 상태)  

[기표] = “이건 분노야!”라는 명명(사회적 명명)

 

결론적으로, “감정은 해석된 정동이다.”라는 문장은 시간 순서의 ‘뒤’가 아니라 인식 구조의 고정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동은 감정보다 발생적으로 앞서지만, 의미화는 사후적이다. 기표는 감각의 직접 산물이라기보다는, 감각이 정동으로 유입되고 감정으로 인식된 이후, 사회적 언어 질서가 그것을 ‘붙들어 명명한 것’, 다시 말해, 기호화된 감정의 흔적이다.

 

다. 비선형 발생

감각→정동→감정이라는 흐름, 결론은 감정의 흔적, 비선형적 발생이라 혼재해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마수미의 입장은 ‘비선형적 발생’이다. 감각→정동→감정은 순서라기보다는 발생의 흐름, 시간의 층위가 혼재하는 과정이다.

 

(1) 감정은 정동의 흔적이다

이는 ‘정동 이후에 감정이 생긴다.’라는 선형 시간 개념이 아니다. 정동은 감정보다 먼저 존재하지만, 우리가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정동을 붙잡는 것은 사후적이다. 즉, 감정은 정동이 인식되며 굳어지는 하나의 ‘기표화된 단면’, 정동은 그 기표의 밖에서 계속 흘러가는 에너지이다.

 

(2) 정동은 감정보다 먼저 발생

마수미는 전통 심리학처럼 ‘감정이 먼저’라고 보지 않고, 그렇다고 감정→정동으로 거꾸로 본 것도 아니다. 대신, 정동은 감정보다 먼저 발생하지만, 시간의 인식 차원에서 감정보다 나중에 ‘포착’된다. 이것이 바로 마수미가 강조하는 non-linear temporality(비선형적 시간성)이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비유로 다시 풀면, 정동은 먼저 몸에 깔리는 공기이다. 감정은 그 공기를 “아, 이건 분노다”라고 나중에 이름 붙이는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을 붙인 감정을 먼저 인식하므로, 정동은 뒤늦게 ‘흔적처럼’ 인식되지만, 사실은 항상 먼저 작용한 것이다.

 

(3) 소결론

마수미는 다른 이들과 ‘역순’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의 시간과 신체적 시간의 비대칭성, 즉 “먼저 작용하고, 나중에 인식되는 것”으로서 정동을 말한다. 그래서 감정은 언제나 정동의 흔적, 또는 기호 체계가 고정한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동은 그 바깥에서 계속 ‘흐르는 열’로 남아 있다.

 

라. 발생의 흐름

이 문제는 단순한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발생(affecting)’과 인식(perceiving), 명명(naming)의 층위가 어떻게 다른 시간성 속에서 작동하는가에 대한 아주 섬세한 철학적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감각→정동→감정”이라는 도식은 ‘인식 가능한 순서’가 아니라, ‘작용의 계열’ 또는 ‘발생의 흐름’을 설명하는 데 유효한 모형이다. 마수미나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선형 시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세 개념의 작동 차원을 아래 표와 같이 다시 정리해 본다.

 

 

왜 “감각→정동→감정”이라고 하는가?

이 도식은 보통 ‘발생 순서’(ontological order)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어떤 자극이 우리 신체에 영향을 줄 때, 감각은 자극이 신체를 통과하는 첫 번째 물리적 반응(예: 빛, 온기, 진동 등)이다. 정동은 이 감각이 몸 전체에 에너지 흐름으로 확산될 때의 상태(기분 나쁜 기운, 초조함, 이유 없는 긴장 등)이다. 감정은 그 정동 상태가 언어적/사회적으로 의미화되어 붙잡힌 상태(“아, 나 지금 화났어”)이다.

 

이 순서는 발생론적으로 ‘정동이 감정보다 먼저’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상 감정을 먼저 포착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수미는 이 과정을 “비선형적 시간성”이라고 말한다.

 

그럼 “역순”이라는 생각은 왜 드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화났다”는 감정을 먼저 자각하고, “왜 그랬지?” 하며 신체적 정동 상태를 되짚는다. 때로는 어떤 감각(냄새, 촉감 등)이 영향을 주었음을 나중에 파악한다. 이때 우리는 ‘감정→정동→감각’처럼 느끼지만, 철학적으로는 이게 의식의 사후적 구성 과정이며, 정동이 이미 먼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마수미의 요지이다.

 

철학적 결론을 말하자면, 감각→정동→감정 도식은 원인-작용의 흐름을 설명하는 구성 방식이다. 이 세 가지는 고정된 직선적 순서가 아니다. 비선형적·중첩적 시간성 안에서 ‘겹쳐 발생’한다. 마수미에게 정동은 감정보다 먼저 생기지만, 감정보다 뒤늦게 인식된다. 우리는 때때로 그 순서를 “뒤집혔다.”라고 오해한다.

 

이를 다시 요약하자면, 정동은 감정보다 먼저 작동하지만, 감정보다 나중에 인식된다. 그래서 “감각→정동→감정”은 발생 순서일 뿐, 인식 순서는 때로 반대처럼 느껴질 수 있다.

 

4. 직관적 사유의 산물, 재생적 상상력의 산물에 머물 것인가

 

가. 2025년 지역 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도 산문 구조

 

 

저 많은 소망들을 들어주려면

신은 바쁘겠지

내 소원만 꼭대기에 올려 새치기를 하려는데

한 아이가

누군가 놓고 간 마음을 기웃거린다.

 ―한지선, 경남도민신문 당선작 「소원이 닿지 않는 이유」 전문
 

 

 

 

낙하산 펴기 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창공을 한 순간 가른다

    

오늘도 인생을 건다  

푸른 초원을 향해

―백운옥, 오륙도신문 당선작 「고공낙하」 전문

 

 

인용 디카시 두 편을 시적 자격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해 본다. 한지선의 「소원이 닿지 않는 이유」는 ‘소망’과 ‘소원’이라는 개념어를 사용했다. 그 자체로 산문적인 형식을 띤다. 이 디카시는 전통적인 시의 형식이라기보다는 산문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즉, 시조나 자유시처럼 운율이나 형태적인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산문을 행갈이한 형식이다.

 

이러한 산문적 형식은 디카시의 한계에 맞닿아 있다. 디카시 역시 디지털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을 통해 감각적 순간을 포착하지만, 그 감정적 깊이나 문학적 전개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반응을 중심으로 한다. 한지선의 작품도 소망과 소원을 이야기하면서 정서적 반응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따라서, 한지선의 작품은 산문적인 특성을 지닌 디카에세이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는 시적 창작이라기보다는 감각적 경험을 나열하는 형식에 가깝다. 시로서 자격을 얻기에는 한계가 있다.

 

백운옥의 「고공낙하」는 일기장에나 등장하는 ‘오늘도’라는 시간어, ‘세상’과 ‘인생’이라는 개념어, ‘아름답다’라는 직접 정서만 보더라도 일기 형식의 산문이다. 주로 일기 형식에 가까운 서술적 접근을 보여 주고, 직접적인 정서 표현이 중심이라서 시적 자격을 얻기 어렵다. 이러한 특성은 디카에세이 형식에 잘 맞아떨어진다. 전통적인 시적 형식보다는 산문적이고, 회고적인 성격이 강하다. 결국, 이 디카시도 산문적이고, 일기 형식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 두 디카시에서 ‘날시’ 개념을 어떻게 구현하고, 작가의 감각적 경험이 텍스트와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한지선의 디카시는 ‘소원’과 ‘소망’이라는 개념어를 사용한다. 직관적인 감각적 반응을 표현한다. 이 작품에서 소망을 쫓는 순간적 감동과 그로 인한 감정의 폭발은 ‘날시’ 개념에 잘 부합한다. 즉,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감각적 충격이 텍스트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디카시 창작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놓고 간 마음을 기웃거린다”라는 시행에서 감각적인 이미지가 언어로 변환한다. 독자는 그 순간의 정서적 여운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또한, 감각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 작품에서 한지선은 디지털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하는 방식을 통해 그 감각을 포착한다. 시각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명확히 묘사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그 순간의 감각적 여파를 ‘느끼는’ 경험을 한다. 이 과정이 단순한 ‘직관적 사유’로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즉, 창조적 상상력으로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감각적 순간을 단순히 기록하는데 그칠 때, 이론적 창조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백운옥의 디카시에서 ‘날시’와 감각적 반응을 살펴본다. ‘오늘도’라는 시간어와 ‘세상’과 ‘인생’ 같은 개념어는 감각적인 순간을 포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 작품 역시 순간적인 감정과 직관적인 반응을 텍스트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날시’의 개념을 따른다. “창공을 한순간 가른다”라는 구절은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순간을 포착한다. 그 감동을 시각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또한, 감각적 이미지를 텍스트로 변환하면서 독자에게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감정적 반응을 유도한다. 이 역시 ‘창조적 상상력’으로 확장하지 않는다. 재생적 상상력의 범위 내에서 기존의 감각을 반복하고, 재구성하는 데 그친다. 이 작품에서도 창조적 상상력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 감각적인 순간을 기록하는 성격이 강해진다.

 

나. 이론적 관점에서 날시의 한계

두 작품 모두 감각적 경험을 직관적으로 포착한다. 이를 텍스트와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날시’ 개념을 구현했다. 이들이 텍스트와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감각적 순간의 기록이 주가 되고, 그 기록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발전하는 과정에는 제한이 있다. 디카시가 ‘날시’에서 벗어나 진정한 창조적 상상력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 순간적 감동을 넘어 새로운 의미와 형상을 창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지선과 백운옥의 디카시를 통해 ‘날시’ 개념이 어떻게 감각적 반응을 포착하고 텍스트로 변환하는가? 그 과정이 직관적 사유에 머물고 창조적 상상력으로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날시’ 개념을 잘 구현한다. 그 창작 과정이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감각의 재현에 그친다는 점에서 디카시 이론의 한계를 보여 준다. 창조적 상상력으로 확장을 위해서는 이러한 감각적 순간을 넘어서는 심화된 시적 창작이 필요하다.

 

다. 디카시의 직관적 사유와 정동 단계

디카시를 ‘직관적 사유의 산물’, ‘재생적 상상력의 산물’,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순서로 볼 때, 이론 자체 문제로 인해 정동 단계의 직관적 사유의 산물에 머문 디카시가 9할이 넘는다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를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이런 주장을 계속하면 디카시 이론은 무장해제 상태임을 강조하는 셈이다.

 

디카시를 ‘직관적 사유의 산물’, ‘재생적 상상력의 산물’,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세 단계로 나누었을 때, 디카시의 대부분이 정동 단계의 직관적 사유(비이성적 사유 층위)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문제는 디카시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적인 문제이다.

 

디카시가 정동 단계의 직관적 사유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을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포착한다. 그 이미지를 문자로 재현하는 것에 그친다는 의미이다. 이는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이나 감각적 자극에 의존하는 것으로, 시적 창작이 감각적 경험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디카시는 감각적 경험이나 극단적인 순간적 감동을 언어로 재현하는 작업이다. 창조적 상상력보다는 재생적 상상력에 더 가까운 특성을 보일 수 있다. 즉, 디카시는 이미 존재하는 감각적 반응이나 이미지를 재생하고 디지털 이미지로 포착하는 방식으로 창작이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직관적 사유가 우세하게 작용한다.

 

라. 창조적 상상력의 한계

디카시의 창작 과정이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을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둔다. 창조적 상상력은 완전히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고,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디카시는 기본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감각적 순간을 재현하는 형태에 가깝다. 그 자체로 완전히 창조적이라기보다는 재생적인 특성을 갖는다.

 

디카시에서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나 상태를 디지털 매체를 통해 포착한다. 그 이미지를 시적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다. 이는 창조적 상상력의 개념에서 기대하는 완전한 새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기존의 것들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가깝다. 재생적 상상력은 기존의 자원을 이용하여 새로운 형태로 다시 만드는 것이다. 디카시의 많은 작품은 창조적이라기보다는 변형적인 성격을 지닌다.

 

마. 디카시의 창조적 상상력과 직관적 사유

디카시가 직관적 사유에서 출발한다고 볼 때, 그것이 창조적 상상력으로까지 확장할 가능성은 제한적일 수 있다. 정동 단계의 직관적 사유는 본질적으로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에 가깝다.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순간적 표현에 더 가깝다. 디카시의 대부분은 정동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한 직관적 사유의 산물에 머문다. 그로 인해 창조적 상상력을 시적 본질로 자리 잡게 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바. 에세이 특성과 창조적 상상력

디카시가 ‘에세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서 발생한다. 디카시의 많은 작품은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순간을 그대로 기록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가깝다. 문학적 창조보다는 체험의 기록처럼 느껴지기 쉽다. 이 점에서 디카시가 문학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시가 아니라, 감각적 직관에 의존하는 에세이 특성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디카시를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로 보는 것은 그 본질적 특성을 오해하는 것일 수 있다. 디카시가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이라기보다는, 자연과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시적으로 포착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 창작의 본질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현실을 직관적으로 담아내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 소결론: 디카시와 창조적 상상력

디카시가 직관적 사유의 산물에 머무는 이유는, 감각적 경험을 즉각적으로 포착하고,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디카시가 창조적 상상력으로 불리기 어려운 이유는, 그 본질이 기존의 감각적 순간을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적 상상력이라는 명칭은 디카시의 직관적이고 재생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적합하지 않다는 점에서 비판적일 수 있다.

 

디카시는 창조적 상상력이 아니라, 재생적 상상력과 직관적 사유의 산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디카시가 가지는 독특한 시적 가치와 디지털 매체를 통한 새로운 표현 방식은 문학적 실험으로서 의미가 있다.

 

결국, 직관적 사유와 재생적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디카시는 시보다는 에세이 성격이 짙다. 이론적으로도 창조적 상상력의 범주에 포함하기도 어렵다. 이 글에서 디카시의 본질을 상상력의 단계(직관적→재생적→창조적)로 분석한 것은 이론적으로 강력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아래와 같이 요약하여 도식한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저서 : 평론집 10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

이메일 shin1004a@hanmail.net

 

작성 2025.08.27 10:26 수정 2025.08.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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