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임진왜란 시기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은 장암창지

이봉수

지난 칼럼에서 임진왜란 시기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이 선진리 선진 마을(조선 후기 사천 선소)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번 칼럼에서는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이 조선 후기 장암창이 설치되었던 장암 지역(지금의 경남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구호 마을)임을 밝히고자 한다.

 

충무공 이순신은 사천해전의 전투 경과를 전쟁 보고서인 장계 「당포파왜병장」에 자세히 기록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 장계에는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의 지명이 ‘사천 선창(泗川船滄)’으로 기록되어 있다. 노산 이은상은 『이충무공전서』를 번역하면서 사천 선창을 지금의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라고 서술하였지만, 지난 칼럼에서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그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은 어디일까.

 

충무공 이순신의 기록 이외에 사천해전이 벌어진 지역을 기록한 자료가 한 가지 더 존재한다. 『증병조참판정공전贈兵曹參判鄭公傳』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글은 우산 안방준(安邦俊, 1573∼1654년)의 제자 주엽(朱曄, 1596∼1638년)이 쓴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년)의 전기이다. 

 

녹도만호 정운은 임진왜란 시기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부산대첩에서 전사한 장수로 유명한 인물이다. 정운은 1592년 9월 부산대첩에서 전사한 직후 북병사로 추증되어 녹도의 이대원(李大源, 1566∼1587년) 사당에 배향되었으며, 이후 다시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정운 휘하에서 수군으로 복무했던 오윤건(吳允健)이라는 인물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 구술한 내용을 주엽이 글로 옮긴 글이 『증병조참판정공전』이다.

 

안방준의 문집 『은봉전서』에 「부산기사」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안방준이 「부산기사」를 쓰면서 저본으로 삼은 글이 바로 『증병조참판정공전』이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임진왜란 시기에 벌어진 여러 해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그 내용에 종종 오류가 나타나므로 참조에 주의가 필요하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옥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등의 전투 기록을 검토하여 이 글이 가진 사료적 가치를 밝힌 논문(「『증병조참판정공전』의 임진왜란 초기해전 기록 고찰」, 『지방사와 지방문화』 27-2, 2024, 역사문화학회)이 출간되어 있으므로 『증병조참판정공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칼럼에서 다루지 않는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을 ‘사천의 장암(泗川之塲巖)’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놀랍게도 사천해전이 벌어진 지역의 지명과 그곳이 속한 군현(郡縣)이 상세히 등장하는 것이다. 장암은 조선 후기 전세를 보관하던 장암창이 설치되었던 곳이기 때문에 조창(漕倉: 전세를 보관하던 창고)을 주제로 삼는 연구 자료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다. 다음은 ‘사천의 장암(泗川之塲巖)’이 등장하는 『증병조참판정공전』의 해당 기록이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사천해전지 ‘사천의 장암(泗川之塲巖)’(자료 출처: 『전남의 서원·사우 -사액서원·사우편-』, 1988, 목포대학박물관)

 

장암은, 조선 중종 때 훈련도정(訓練都正)을 지낸 절충장군 이순(李珣)이 노년에 머물렀던 정자 쾌재정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경남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구호 마을에는 장암창지, 쾌재정 터, 쾌재정 유래를 각각 안내하는 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다. 다음은 장암창지 표지석과 쾌재정 유래 표지석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장암창지 표지석(왼쪽), 쾌재정 유래 표지석(오른쪽)

 

장암은 조선시대에 진주에 속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성여신(成汝信, 1546∼1643년)이 1632년에 편찬한 진주 읍지 『진양지』에 장암과 장암창에 관한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양지』와 달리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을 ‘사천의 장암(泗川之塲巖)’으로 서술함으로써 장암을 진주가 아닌 사천에 속한 곳으로 기록하였다. ‘사천의 장암(泗川之塲巖)’이라는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조선시대 사료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장암을 사천에 속한 곳으로 서술한 사료가 여럿 발견된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曺植, 1501∼1572년)이 진주·사천·곤양 등을 유람한 일을 적은 유람기 「유두류록(遊頭流錄)」, 정경세(鄭經世, 1563∼1633년)의 문집 『우복집』에 실린 1624년 계문, 유형원(柳馨遠, 1622∼1673년)의 지리지 『동국여지지』 등이 장암 또는 장암창을 사천에 속한 곳으로 기록하였다. 즉, 장암은 본래 사천에 속했다가 나중에 진주로 그 소속이 바뀐 사실을 이들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나타난 ‘사천의 장암(泗川之塲巖)’은 전투 지역의 지명(장암)을 구체적으로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지명이 속한 군현(사천)까지 해당 시기(임진왜란 시기)에 맞게 정확히 서술하였다. 따라서 사천해전이 벌어진 지역을 언급한 ‘사천의 장암(泗川之塲巖)’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기록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의 모습을 ‘산이 7∼8리쯤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逶迤七⼋⾥許)’라고 묘사하였으며, 이 높은 산 위에 일본군이 주둔했다고 기록하였다. 앞선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이 묘사는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의 지리적 특징을 밝혀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증병조참판정공전』 또한 사천해전이 벌어진 지역에 대해 ‘저들(일본군)은 높은 곳에 있고 우리(조선 수군)는 낮은 곳에 있어서(彼高我下)’라고 묘사하였다. 「당포파왜병장」과 마찬가지로 『증병조참판정공전』 또한 일본군이 높은 지역에 주둔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장암에 해당하는 지금의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구호 마을이 과연 그러한 지리적 특징을 가졌는지 살펴보자.

 

1918년 축동면 구호리 일대 지도 (자료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위 지도는 1918년경 작성된 지도로서 조선시대 장암에 해당하는 구호리 구호 마을 일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위 지도는 사천공항 개항이나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이전 지형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여준다. 위 지도에서 ‘장암창지’로 표시한 점선 동그라미에 해당하는 곳에 장암창지, 쾌재정 터, 쾌재정 유래를 각각 안내하는 표지석 3기가 현재 나란히 서 있다.

 

위 지도에서 ‘장암창지’로 표시한 지역의 주변 지리를 살펴보면, 그곳을 포함한 그 북서쪽 지역 일대가 모두 높은 산줄기로 쭉 이어져 있어서 해안을 내려다보고 공격할 수 있는 지형이다.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을 ‘산이 7∼8리쯤 구불구불하게 뻗쳤다.’라고 묘사하였다. 7~8리는 약 2.75~3.14km로서 간략히 3km 정도의 거리이다. 장암창지 앞바다에서 서북쪽 장암창지 방향을 바라보면 육안에 들어오는 산줄기의 너비가 대략 3km 또는 그 이상에 이른다. 장암창지 주변 지형은 「당포파왜병장」의 묘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에 대해 ‘썰물 때에는 조선 수군의 판옥선 같은 큰 배가 해안으로 쉽게 돌진할 수 없었으며, 밀물이 들어오고 나서야 배(판옥선)가 해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라는 내용을 기록하여, 그 일대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지리적 특징을 가졌음을 나타내었다. 다시 말하자면,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은 썰물 때 판옥선이 들어가지 못할 만큼 수심이 낮아지는 곳이다.

 

조선시대 장암창지에 해당하는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구호 마을 앞 해안은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여 조수 간만의 차가 사천만에서 가장 큰 지역이다. 장암창지 앞에 위치한 사천시 사천읍 용당리 일대 하구 지역은 길호강(중선포천)과 사천강에서 공급되는 부유하중 토사들이 퇴적되는 곳으로서, 조류에 의해 운반되는 토사의 양보다 하천에 의한 공급량이 많아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였다.

 

현재 축동면 구호리 일대 지도 (자료 출처: 구글지도)

 

위 지도는 장암창지가 있는 축동면 구호리 일대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사천공항이 들어서고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본래의 지형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장암창지 앞에 위치한 하구 지역은 아직 간석지의 모습이 남아있다.

 

『진양지』에도 장암 앞 해안가가 조선시대에 수심이 낮은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다음은 그 기록이다.

 

『진양지』, 「교량」

장암교(塲巖橋): 사천 땅으로 통한다. 돌을 늘어놓아 만들었는데, 밀물 때는 보이지 않고 썰물 때는 드러난다.

 

『진양지』에 나타난 장암교는 지금의 장암창지 앞에 있는 중선포교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이다(2012년 출간된 『축동면지』 참조).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이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 판옥선이 들어가기 어렵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장암창지 앞 해안의 지리적 특징과 일치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지역을 ‘사천의 장암(泗川之塲巖)’으로 기록하였다. 남명 조식의 유람기인 「유두류록」, 정경세의 『우복집』에 실린 1624년 계문, 유형원의 지리지 『동국여지지』 등의 여러 사료가 본래 장암이 사천에 속한 곳임을 기록함으로써 『증병조참판정공전』 기록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둘째,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사천 선창의 모습을 ‘산이 7∼8리쯤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逶迤七⼋⾥許).’라고 묘사하였다. 조선시대 장암창이 있던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구호 마을은, 그곳을 포함한 그 북서쪽 지역 일대가 높은 산줄기로 쭉 이어져 있어서 해안을 내려다보는 지형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은 「당포파왜병장」의 묘사와 일치한다.

 

셋째,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이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판옥선이 썰물 때 해안으로 쉽게 돌진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간석지가 넓게 발달한 장암창지 앞 해안의 지리적 특징과 일치한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등장하는 지명 ‘사천의 장암’은 위 3가지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으로 비정(比定)될 수 있다.

 

사천의 장암을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으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저번 칼럼에서 『난중일기』의 1594년 8월 16~17일 기록을 통해, 『난중일기』에 기록된 ‘사천 선창(泗川船滄)’이 사천만 최북단에 위치했음을 입증하였다. ‘사천 선창(泗川船滄)’은 「당포파왜병장」에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으로 기록된 지명이다.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구호 마을에 위치한 장암창지는 사천만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서 앞의 『난중일기』 기록과 부합한다.

 

 

- 본 칼럼은 역사문화학회에서 출간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8권 1호(2025년)에 수록된 논문 「임진왜란 시기 사천해전지의 위치 고찰」의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한 글이다. 이 논문은 역사문화학회 홈페이지(hiscu.or.kr) 또는 한국학술지인용색인 사이트(kci.go.kr)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myisoonsinxsz.zaemit.com/

 

작성 2025.09.03 10:51 수정 2025.09.0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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