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에 사는 49세 여성, 이성희 작가는 오랫동안 ‘엄마’와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왔다.
매일 아이와 가족을 위해 분주히 달리던 삶 속에서,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잊고 지냈던 이름, ‘나’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래된 스케치북과 함께, 지난 시절의 꿈을 다시 꺼냈다.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두 번째 여정을 시작했다.

깊어진 주름과 변한 모습은 처음엔 초라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속에는 지혜와 견딘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는 가족의 부산스러움이 사라진 저녁, 작은 방 한 켠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몄다.화분 하나, 조명 하나, 그리고 좋아하는 책 몇 권. 그 공간은 단순한 방이 아니라, 잊었던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작은 안식처였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여러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답장은 늘 같았다. “죄송합니다.” 반복된 실패는 자신감을 잃게 했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겁이 났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서툴러도 괜찮아. 지금부터 시작하면 돼.”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주 작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그림을 다시 꺼내 들었을 때, 손은 떨리고 선은 삐뚤빼뚤 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자유로웠다. 매일 30분 걷기, 건강한 식단, 문화센터에서의 새로운 만남. 그렇게 사소한 습관들이 모여 그의 삶을 다시 환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은 활력을 주었고,취미는 어느새 삶의 또 다른 희망이 되었다.
“엄마”와 “아내”로 불리는 삶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이제 그는 ‘이성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서고 싶다.
아직은 결과가 뚜렷하지 않아도, 매일 한 걸음 내딛는 자신을 믿는다. 흙 속에 묻혀 있던 작은 씨앗이 결국 꽃을 피우듯, 우리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경북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에 사는 한 여성의 개인적인 경험에 머물지 않는다.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뒤로 밀어두었던 수많은 중년 여성들의 마음을 울린다.
“괜찮아요. 늦지 않았어요. 우리는 지금부터 다시 피어나면 돼요.”이성희 작가의 목소리는 오늘도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다시 피어날 작은 씨앗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