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 11. 해안으로 내려간 사람들, 오키나와 패총 시대 후기를 말하다

일본 본토와 다른 시대 구분, ‘패총 시대’의 독자적 흐름

어로와 교역 중심의 생활, 풍부한 해양 자원에 기반한 문화

‘조개의 길’로 이어진 활발한 교류와 오키나와만의 독창성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

 

 

오키나와의 선사 시대는 일본 본토의 조몬·야요이·고분 시대 구분과는 달리, 후기 구석기 시대와 패총 시대로 나뉜다. 약 7,000년 전부터 12세기까지 이어진 패총 시대는 본토보다 훨씬 긴 기간을 차지했는데, 이는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자연 환경 덕분에 주민들이 오랫동안 어로·수렵·채집 중심으로 안정적인 삶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패총 시대는 전기와 후기로 다시 나뉘며, 후기(약 2,300년 전~12세기)는 일본 본토의 야요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주거지와 생업 구조가 크게 변한 시기로 평가된다.

 

이전까지 석회암 대지 내륙에 살던 주민들은 후기 들어 해안 사구 지대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 변화는 생업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바다에 인접한 정착지는 곧 어로와 교역이 생활의 중심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해안 유적에서 출토된 패총에는 다양한 어패류 화석이 쌓여 있으며, 특히 대형 조개(샤코가이)로 만든 그물추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그물을 사용해 어업을 전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패총 시대 후기의 오키나와는 해외와의 교역이 두드러졌다. 유적에서는 본토 규슈와 중국에서 유입된 철기·동기가 다수 확인되었고, 이는 기존의 석기를 대체하며 생산력과 무력 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오키나와와 아마미 제도에서 채집된 고호우라 조개·이모 조개는 귀한 장신구 재료로 사용됐다. 이들은 큐슈로 대량 수출되어 팔찌로 가공된 뒤 일본 각지로 유통되었으며, 약 800년 동안 이어진 이 교역망은 ‘조개의 길’이라 불린다.

또한 교역을 통해 야요이식 토기와 새로운 장례 풍습인 상자형 석관묘가 유입되는 등 다양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역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는 본토 야요이 문화와는 다른 독자적 발전 경로를 보였다. 농경은 후기 말기에 들어서야 시작되었으며, 벼농사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농업은 12세기 무렵 이후로 추정된다.

 

지역에 따라 차이도 뚜렷했다. 미야코·야에야마 제도 등 사키시마 제도는 본토의 영향이 적고, 오히려 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남방 문화권의 흔적이 강했다. 이 지역에서는 일시적으로 토기 사용이 사라진 무토기 문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샤코가이 조개로 만든 도끼 같은 유물은 동남아시아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패총 시대 후기의 오키나와 주민들은 해안 사구 정착 → 어로와 교역 중심의 생활 → 독자적 문화 형성이라는 변화를 겪었다. 풍부한 해양 자원을 활용하고, 일본 본토와 중국·동남아시아와 활발히 교류하면서도, 본토와는 다른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류큐 왕국 형성과 문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오키나와의 바다는 단순한 생계의 공간을 넘어, 교역과 문화 융합의 장이었다.

작성 2025.09.18 10:42 수정 2025.09.1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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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