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2,300년 전부터 1,700년 전 사이,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의 야요이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사람들은 내륙 류큐 석회암 대지에서 벗어나 해안 사구 지대로 거주지를 옮기며 생활했다. 발굴된 패총에서 다량의 조개류와 어패류 화석, 그리고 조개로 만든 그물추가 확인되어, 그물 어업이 활발히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야요이 시대 오키나와에서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철기와 동기의 다량 출토다. 기존의 석기를 대신한 금속기는 단순한 생활 도구의 변화를 넘어, 활발한 해외 교역의 결과물이었다. 이후 고분 시대에는 곡물, 직물, 금속기를 포함한 교역품들이 오가며, 지역 간 경제와 사회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키나와와 아마미 제도에서 채취된 고호우라 조개와 이모 조개는 큐슈로 대량 수출되었다. 큐슈에서는 이를 가공해 조개 팔찌(貝輪)를 제작했으며, 일본 전역으로 유통되었다. 이러한 교역로는 ‘조개의 길(貝の道)’이라 불리며, 야요이 시대부터 고분 시대까지 약 800년 동안 이어졌다. 이는 오키나와 지역이 단순한 섬 지역이 아니라 경제적·문화적 연결망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교역을 통해 야요이 토기와 새로운 장례 방식인 상자형 석관묘가 오키나와에 전래되었다.
패총 시대 후기에는 중국과의 교류도 두드러졌다. 오키나와에서는 철기, 중국 화폐인 개원통보(開元通宝), 그리고 야코우 조개(야광 조개)가 주요 교역품으로 확인된다. 11세기 무렵에는 가무이 도기와 같은 생산품도 교역 목록에 추가되어, 교역 범위는 더욱 확장되었다.
최근 기노완시에서 발굴된 약 2,700년 전 밭 유적은 오키나와의 농경 문화가 기존 학설보다 훨씬 이른 시기, 큐슈와 비슷한 시점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농경이 구스크 시대(약 800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기존 주장에 재검토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한편, 미야코·야에야마 제도를 포함하는 사키시마 제도는 오키나와 본섬과 달리 일본 본토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 이곳은 오히려 대만·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남방 문화권과 강한 연관성을 보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2500년부터 서기 10세기까지 토기 사용이 단절된 ‘무토기 문화’ 시기를 겪었다. 대신 조개 도끼(貝斧) 같은 유물이 주로 발견되며,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유입되었거나 문화적 유사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약 800년 전, 구스크 시대에 들어서야 도쿠노시마의 가무이 도기나 나가사키산 돌 냄비가 등장하며, 본토와 가까운 문화적 접촉이 이루어졌다.
야요이 시대 오키나와는 철기와 동기의 수용 → 활발한 교역 → 독자적 문화의 발전이라는 과정을 겪었다. 큐슈와 중국, 남방 지역과의 교역은 오키나와를 단순한 섬이 아닌 동아시아 교역의 허브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사키시마 제도와 같은 주변 지역은 본토와 다른 길을 걸으며, 남방과의 연계 속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이는 훗날 류큐 왕국의 형성과 문명 발달의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