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당항포해전의 전투 지역과 왜선 소속

이봉수

1592년 4월 13일(이후 음력)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은 조속히 전라좌수군을 정비한 뒤, 해로를 통해 침범해오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5월 4일 제1차 출전을 개시하였다. 전라좌수군은 곧바로 경상우수군과 합세한 다음 남해안 일대를 수색하다가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3번의 전투를 치러 승리를 거두었다.

 

제1차 출전 이후 전황을 주시하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 함대가 사천과 곤양까지 이르렀다는 정보를 접하자 제2차 출전을 개시하였다. 제2차 출전 시기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전라좌수군은 6월 4일 아침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이끌고 온 판옥선 25척과 합세하였다.

 

전라우수군까지 합세한 조선 수군은 착량(통영시 당동과 미수동 사이 해협)에서 밤을 보낸 뒤, 다음날 6월 5일에는 당포해전 당시 당포로 다가왔다가 거제 방향으로 도주한 왜선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추격 시작 후 곧 도주한 왜선의 행적을 알려주는 첩보가 입수되었는데, 다음의 세 가지 사료에 그 입수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당포파왜병장」

거제에 사는 향화인(귀화인) 김모(金毛) 등 7~8명이 작은 배에 함께 타고 와서 기쁘게 맞이하며 말하기를 “당포에서 도망간 왜선이 거제를 경유하여 고성땅 당항포에 옮겨 정박하였다.”라고 말하였다.

 

『난중일기』 잡록, 「당포파왜병장」 초안

고성까지 20리쯤 남았을 때 섬 위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이 불러서 말하기를 적선 대·중·소 도합 30여 척이 지금 고성 땅 당항포에 들어가 모여있다고 하므로 …

 

『증병조참판정공전』

전라좌수사가 전라우수사의 군사를 합치고 동쪽으로 전알도(全謁島-견내량)에 이르니 피난하던 거제 사람이 해안 위로 나와 외치며 알리기를 “26일(5월) 밤에 적선이 당포에서 나와 한산을 지나 전알도를 넘어 고성의 족슬포(族瑟浦-소소포로 추정)로 들어가서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당포파왜병장은 조선 수군의 제2차 출전 경과를 기록한 자료로서,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의 사본이다. 당포파왜병장 초안은 난중일기 잡록에 포함되어 있는 자료로서, 이순신 장군이 당포파왜병장을 작성하기 전에 쓴 글로 추정된다. 난중일기 잡록은 일기 중간에 비망록 형태로 쓰여진 글로서 여기에는 공문, 명령서, 편지, 장계 초안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주로 1593년 3월 일기와 5월 일기 사이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우산 안방준(安邦俊, 1573∼1654년)의 제자 주엽(朱曄, 1596∼1638년)이 쓴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년)의 전기이다. 임진왜란 시기 정운 휘하에서 수군으로 복무했던 오윤건(吳允健)이라는 인물이 임진왜란 이후에 구술한 내용을 주엽이 글로 옮긴 자료이다. 후일 안방준이 증병조참판정공전을 저본으로 삼아 글을 썼는데, 그 자료가 바로 ‘부산기사’이다. 그런데 이 자료는 전투 관련 날짜가 종종 잘못 기록된 오류를 가지고 있다.

 

조선 수군이 당항포해전 직전 민간인들로부터 적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얻은 사실은, 이순신 장군이 첩보망을 매우 효과적으로 운용했음을 보여준다. 위 세 가지 복수의 사료에 나타난 내용을 통해, 당포해전 이후 조선 수군이 거제 방향으로 도주한 왜선을 추격한 경과가 명확히 드러난다.

 

 

당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왜선의 행적을 파악한 조선 수군은 ‘당항포 앞바다’에 이르러 진해성(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바깥 몇 리 가량되는 들판 중간에 함안군수 유숭인이 기병 1,100명을 이끌고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당포파왜병장에 ‘당항포 앞바다‘라고 언급된 곳은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앞바다로서 당항만 입구 바깥쪽 바다를 가리킨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당항포해전이 벌어진 지역 당항포를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당항포로 한정하여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당항만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 수군이 함안군수 유숭인 휘하의 기병을 발견한 정황만 보더라도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당포파왜병장은 당항포의 지형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는데, 이는 당포파왜병장에 언급된 ‘당항포’가 ‘당항만’을 의미함을 명확히 말해준다. 다시 말하자면, 당항포해전이 벌어진 전장은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당항포를 포함한 보다 넓은 지역인 당항만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당항포 해구의 형세를 물어보니 거리는 10여 리에 이르고 넓어서 배가 들어갈 만하다. (仍問唐項浦海口形勢 則遠可十餘里 廣可容舟)”

 

이순신 장군은 우선 몇 척의 전선을 당항포 입구인 당목(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과 고성군 동해면을 잇는 동진교 다리 아래)으로 들여보내어 당항만의 지리(地利)를 조사하고, 적이 추격해 올 경우에는 물러나는 척하며 적을 유인하도록 지시하였다. 얼마 뒤 당항만으로 들어간 선발대가 신기전을 쏘며 조선 수군 함대에게 빨리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조선 수군 함대는 ​당항포 입구에 복병선 4척을 배치하고 당항만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당포파왜병장은 당항만의 지형에 대해 “양편 산기슭이 강을 끼고 20여 리이며, 그 사이 지형이 그리 좁지 않아 싸울 수 있을 만한 곳(兩邊山麓挾江二十餘里 其間地形 不甚狹窄 可與容戰之地)”이라고 묘사하였는데, 이는 당항만의 주변 지형을 잘 표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당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조선 수군이 줄을 지어 당항만으로 들어가 소소강 서쪽 해안(召所江西岸)까지 이르니 일본군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해안에 정박해 있었다. 이 기록에 언급된 지명 ‘소소강 서쪽 해안’은 전투가 벌이진 지역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소소강은 당항만 끝자락을 가리키며, 그 서쪽 해안은 고성군 마암면이 당항만과 맞닿는 해안 지대를 말한다.

 

필자는 당항포해전 당시 왜선이 정박한 곳을 소소포(召所浦-고성읍 죽계리 평계마을) 부근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소소포는 고성읍치와 대략 10리(4km) 거리에 있는 해상 교통의 요지이며, 당항포해전 시기는 일본군이 고성읍치를 넘나들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소포 주변 지역은 임진왜란의 흔적을 보여주는 머릿개, 잡안개, 도망개 등 여러 구전 지명이 남아있다. 

 

머릿개(고성군 마암면 두호리)는 일본군의 머리를 많이 벤 곳이라서 붙은 지명이며, 도망개(고성군 거류면과 동해면 경계)는 일본군이 육지로 내려 도망친 곳이라서 붙은 지명이다. 잡안개(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남쪽 해안)는 도망치던 일본군을 많이 잡은 곳이라서 붙은 지명이며, 군징이/군진이(고성군 동해면 장기리 서측)는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이어서 붙은 지명이다.

 

아래는 1910년대 지도에 당항포해전 관련 지명을 표기한 것이다. 현재는 당항만 일부 지역이 매립되어 주변 지형이 많이 변했지만 아래 지도는 본래의 지형을 거의 그대로 보여준다.

 

1910년대 당항만 일대 지도 – 자료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 

 

당항포해전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왜선 함대 가운데 대선 4척은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花經)’이라는 흰 글자가 쓰여진 검은 깃발을 세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왜장들 가운데 이러한 깃발을 사용한 인물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편찬한 ‘일본전사 조선역’ 또한 당항포해전 시기 검은 깃발을 세운 왜선 4척을 가토 기요마사 소속으로 추정하였다. 아래는 ‘일본전사 조선역’의 해당 내용이다.

 

자료 출처: 『일본전사 조선역』 본편, 참모본부, 1924

 

아마도 ‘일본전사 조선역’을 집필한 일본 학자들은 당포파왜병장의 기록 때문에 당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초기 육로를 따라 북상했기 때문에 당항포해전에 참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항포해전에 나타난 검은 깃발의 왜선 4척은 단지 그의 휘하에 있던 선박으로 보인다.

 

가토 기요마사가 사용했던 깃발의 모습은 일본측에 관련 사료가 여럿 남아 있다. 아래는 가토 기요마사의 깃발(軍旗)을 소개한 ‘図説·戦国武将118’이라는 일본 책자의 내용이다.

 

 

 

당항포해전에 나타난 검은 깃발의 왜선 4척이 가토 기요마사 휘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이 한가지 더 있다. 일본측 자료인 ‘고려선전기’는 당포해전과 당항포해전으로 보이는 기록을 수록하였는데, 당항포해전 기록 중에 ‘가토(加藤)’라는 이름을 언급한 내용이 등장한다.

 

고려선전기는 옥포해전 기록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자료이다. 옥포해전 기록이 우리나라 기록과 전반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자료에는 당포해전과 당항포해전에 관한 기록도 있지만, 아쉽게도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내용이 상당히 소략할 뿐만 아니라 당포해전과 당항포해전이 벌어진 날짜가 실제 날짜와 달라서, 학자들조차 해당 전투의 기록인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고려선전기’에 실린 당포해전과 당항포해전 기록이다(아래 내용은 가독성을 위해 필자가 일부 보완하였다).

 

『고려선전기』(김시덕 역, 『문헌과 해석』 제57호, 2012)

(1592년) 6월 7일에 구루시마 미치히사(四国志摩守) 님이 크고 작은 배 20척 가량을 이끌고 그 해협 어귀(당포)를 공격하셨다. 그곳을 경계하던 적선 60, 70척과 싸워 (아군의 배는) 1척도 남김없이 부서지고, 구루시마 님은 그곳 섬에 있는 성에서 농성하다가 할복하였다. 일족도 모두 전사하였고, 배도 모두 불타 부서졌다.

또한 가토(加藤主計頭) 님이 크고 작은 50여 척의 배를 이끌고 6월 10일에 그 해협 어귀(당포)로 진격하여 종일 훌륭하게 전투를 벌이셨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항구로 돌아오셨다. 그날 밤 새벽녘에 (다시) 전투가 발생, 가토 님의 큰 배 14, 15척과 그 밖의 작은 배들을 포함하여 34, 35척이 모두 불타 부서지고 남은 배들은 모두 후퇴하였다.

 

위 기록의 앞 문단은 당포해전에 관한 것이고, 뒤 문단은 당항포해전에 관한 것이다. 앞 문단에서 언급된 구루시마 미치히사는 도쿠이 미치유키 등 다른 여러 이름으로도 불리는 왜장으로서, 당포해전에서 전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위 기록은 미치히사가 성에서 농성하다가 전사했다고 서술하였는데, 당포해전은 조선 수군이 당포성까지 상륙을 시도한 전투이므로 내용의 정황상 당포해전 기록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위 기록의 뒤 문단은 ‘가토(加藤主計頭)’라는 왜장이 당포로 진격했다가 다시 어떤 항구로 돌아왔다고 서술하였는데, 이는 당포해전 시기 당포로 다가왔다가 거제 방향으로 도주한 왜선의 행적과 상당히 닮아 있다. 이 기록에 언급된 ‘加藤主計頭’는 가토 기요마사를 말한다. ‘主計頭’는 당시 일본의 관직명으로서 기요마사가 이 관직을 지낸 이력이 있기 때문에 그를 이렇게 칭한 기록이 일본에 여럿 전한다.

 

아래는 우타가와 요시이쿠(歌川芳幾, 1833~1904)라는 일본 화가가 가토 기요마사를 그린 상상화로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花經)’이 적힌 깃발과 그 위쪽에 적힌 그의 이름과 관직 ‘加藤主計頭淸正’이 눈길을 끈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myisoonsinxsz.zaemit.com/

 

작성 2025.10.02 11:02 수정 2025.10.0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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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