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을 화냥년이라 치부하고 강가에 움막을 치고 회절 욕을 시켰다는 홍제천을 찾아가다. 세검정 홍지문에서 홍제원이 있었던 인왕시장까진 흐르는 홍제천은 서울에서 가장 깨끗한 자연수가 흐르는 개천이다. 맑은 자연수가 흐르는 이곳에 환향녀들이 회절욕을 했다는 치욕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환향녀(인질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
병자호란 때 인질로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이 10만 명(청장년 7만, 여인 3만)이 넘었다. 인질 8년 만에 소현세자를 비롯한 봉림대군 등 왕자들과 환향한 여인들은 3천여 명에 불과했다. 환향 인두세를 내지 못한 2만 7천여 명은 돌아오지 못하고 청나라 장수나 병사들에 분양되어 첩이 되거나 환락가 여인이 되었다. 국가는 돈이 없어서 인두세를 못내 결코 구해오지 못하고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삶을 살게 하였다. 최명길은 인두세를 가지고 4차에 걸쳐 심양을 오가면서 환향녀를 구출했으나 재력 있는 부호의 자녀와 고관대작들의 자녀만 데리고 왔다. 그런 환향녀들은 평생 화냥년이란 오명과 슬픔으로 살았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환향녀들은 8년 만에 압록강을 건너 고국의 품에 안기는 기쁨에 젖어 엉엉 울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몸을 더럽힌 여인이라 시집이나 친가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아가씨들은 처녀성 통관검사를 받은 후에 귀가시킨다는 것이었다. 역시 벽제관에 도착했을 때 혜음욕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 몸이 깨끗이 씻고 정조 검사를 한 후 정절녀만 통과시켰다. 몸을 더럽힌 여인은 혜음욕을 시키는 황당한 작태가 벌어졌다. 인질로 잡혀간 여인 중에 정조를 잃지 않은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환향녀 중엔 아이를 낳아 두고 온 여인들도 있었고 오랑캐의 씨를 몸에 담고 온 임신한 여인들도 수백 명에 달했다.
벽제관 만남의 광장에서 부모와 남편의 상봉은 회한의 울음바다였다. 오랜만에 맞는 처자인데 냉담하고 싸늘한 경계의 눈빛이었다. 부정한 여자, 정조를 잃은 여자를 대하는 부모와 남편 그리고 가족들의 표정과 태도는 너무나 살살 맞았다.
벽제관 혜음원(惠陰院)에 수용되다
환향녀들이 한양의 문턱 벽제관에 도착하자 낯선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거리마다 불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때 말을 탄 한성 판윤이 행렬을 멈춰 세웠다.
“여러분들은 당장 집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잠시 이곳 벽제관에서 쉬었다가 갈 것이다. 모두 여장을 풀 준비를 하시오.”
“왜요? 우린 부모 형제를 빨리 만나야 해요.”
“조정의 명령으로 몸을 더럽힌 여자들이기에 몸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가진 후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한양을 지척에 두고 벽제관에서 유숙한다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랑캐 땅에서 더럽혀진 몸을 깨끗이 닦고 가야 한다며 벽제관에 목욕하는 해 음욕 장을 마련하고 유숙하며 목욕을 시켰다.
“이게 고생하고 돌아온 환향녀들에게 할 소리입니까?”
모두 입술을 깨물며 항의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돌아온 환향녀들을 혜음원이란 욕탕에서 몸을 씻는 의식을 갖게 하였다. 환향녀들은 20여 명씩 분리 수용되어 하루에 두 번씩 한 달 동안 목욕을 하였다. 장작불을 떼써 마련한 가마솥 욕탕에선 언제나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번갈아 가면서 여인들은 물을 길어 몸을 정갈히 씻고 또 씻었다.
그런데 혜음욕이 끝나며 일단 돌려보냈지만 아일 임신한 여인들은 이곳에서 아일 낳게 한 후에 돌아가게 하였고 현재는 임신하지 않았지만, 한 달쯤 목욕하면서 오랑캐의 자식을 임신한 여부가 확인되며 아이를 낳을 동안 남게 하였다. 환향녀의 혜음욕 기간엔 가족을 면회시켜 주지 않았다. 여인들은 마치 참선하는 기분으로 하루 두 번씩 정결히 목욕하였다. 임신한 여인들은 혜음원에서 몸을 풀게 하였고 아일 낳으면 청나라로 보냈다. 그러나 혜음욕이 끝나면 다시 서대문 밖 홍제원 회절욕장으로 옮겨 2차 검사를 받고 자연수에 몸을 씻는 회절욕 의식을 갖게 되었다.
환향녀의 정절 검사(처녀막 검사)
혜음원에서 혜음욕을 마치고 1차 임신 검사를 통과하며 홍제원의 회음강으로 넘어와서 2차 정조 신검을 받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처녀막 검사였다. 발가벗긴 나상으로 임신 여부와 처녀성 검사를 받았다. 정조 신검은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여인들은 수치스러운 신체의 부위를 드러내고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처녀막 검사를 받았다. 부인들은 혜음욕만 하면 쉽게 돌아갈 줄 알았으나 부인들은 2차 회절 의식으로 자연수에 3개월간 목욕으로 회절을 하였고. 아가씨들은 처녀막 검사를 한 후 처녀, 비처녀를 구별하고 수태 여부까지 확인하고 처녀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고 처녀성을 잃었으며 회절강에서 회절 의식을 갖게 하였다.
자궁 검사와 질 검사였다. 처녀막 검사는 능욕적이고 치욕적이었다. 처녀막 검사로 처녀로 인정되면 색동옷을 입혀 내보냈다. 처녀로 확인되면 색동옷을 입혀 내보냈고 처녀성을 잃은 흔적이 있으면 검은 옷을 입혀 회절강으로 보냈다.
수많은 여인이 처녀막 자격 검사에서 떨어져 검은 옷을 입고 홍제원 회절강으로 돌아갔다. 색동옷을 입고 나오는 자식을 맞는 부모는 웃었으나 검은 옷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의 마음은 애가 닳았다.
홍제천 회절강(回節江)
검은 옷을 입은 여인들은 화냥년이란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리고 회절 의식을 치러야 귀가 할 수 있었다. 정절 회절(回折)은 1차 3개월, 2차 3개월 동안 자연수에 몸을 씻어 몸을 깨끗이 하는 의식이었다. 1차 회절은 홍제원의 홍제천이었다. 수백 명의 여인들은 홍제천변에 움막을 치고 기거하면서 자연수로 회절 목욕을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여인들은 2차 회절욕을 하였다. 전국적으로 강가에서 회절하는 여인을 볼 수 있었고 이들을 회절녀라 하였고 회절하는 강을 회절강(回節江)이라 불렀다.
아무리 몸을 씻고 수련하는 회절 의식이 끝나도 몸을 버린 화냥년이라는 불명예를 씻을 수가 없었다. 회절녀는 시집을 갈 수 없었고 기혼자는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에 먹칠하였기에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은신하는 여인도 많았다.
환향녀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은 화냥년이었다. 오랑캐들에게 몸을 더럽혀진 매춘녀라는 불명예의 고통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인들이 잇달았다. 영의정 최명길이 인조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전하, 환향녀들은 나라가 잘못하여 만든 죄인입니다. 이들은 집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 모진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부인들은 이혼을 당했고 처녀는 결혼할 수가 없는 원통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빨리 이들을 복권하는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
“내 엄히 일렀거늘 그런 작태가 아직도 만연한단 말이오?”
인조왕이 유림들에게 인권의 부당성을 지적하자 유림은 왕을 성토하였다.
“유교 근본을 국시로 삼는 조선에서 염연히 삼강오륜이 있고 칠거지악이 있는데 몸을 망친 부인과 딸을 용서한다는 것은 국가의 존엄한 정체성을 흔드는 행위일진대 임금이 더러운 몸을 가진 여인들을 보호하려고 함은 부당하니 절대 용납이 안 되는 일이옵니다. 몸을 버린 여자는 정상적인 가정부인이 될 수 없습니다.”
홍제천 홍등가 주점
홍제천 회절 강변에 새로운 명물이 등장하였다. 집에서 쫓겨난 환향녀들은 살길을 찾아 이곳에서 주막을 차렸다. 환향녀들은 홍등을 달고 술을 팔았다. 점점 많은 환향녀가 홍등가로 모여들었다. 환향녀 집이란 뜻으로 홍등을 달았는데 갑자기 술집이 늘어나면서 매춘가가 형성되고 주객들이 모여들었다. 홍등가는 홍제천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홍등을 단 기방과 술집이 늘어났다. 환향녀들은 술과 몸을 팔고 조정과 선비들에게 맞섰다.
환향녀의 나체시위
홍등가 여인들은 유교의 원리를 비방하며 유림을 없애라고 시위를 하였다. 향교를 불태워라. 이조판서 딸 환향녀 한춘옥은 홍제천에 무학정이란 요정을 차리고 전국에 흩어져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화냥녀들을 불러들였다. 환향녀가 화냥년이 된 여인들이었다. 한춘옥은 기녀들을 불러놓고 외쳤다.
“시가에서 쫓겨난 예조판서의 며느리 이화영은 머릴 깎고 절로 들어갔답니다. 그뿐 아니라 화냥년이라고 놀리는 사나운 눈초리에 견디지 못해 자살한 여인들이 기백에 이르렀고. 우린 먹고 살기 위하여 술을 팝니다. 그런 여인들이 천여 명이 넘으며 거리를 헤매는 소박맞은 여인이 기천입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참고 살아야 합니까? 우린 목숨을 걸고 우릴 학대하는 유림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천여 명이 넘는 화냥녀가 종로 거리에 나왔다. 여인들은 가슴을 드러낸 속옷을 입고 집단 나체시위를 벌였다.
“환향녀를 학대한 유림을 불태워라.”
환향녀들의 속옷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덩달아 주막과 기방에서 홍등을 달고 유림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였다. 유림과 화냥년들의 대결이 극도로 위험 수위에 올랐다. 인간의 존엄한 인권을 무시하고 성리학의 원리를 내세워 인간을 금수로 내모는 유학의 본산인 향교에 불을 질렀다. 전국의 향교가 산발적으로 불타자 유림은 조정에 이를 막아달라고 상소를 하였다. 성난 화냥녀들이 성균관으로 모여 나체 성토를 하였다.
“나라를 못 지킨 잘못으로 정조를 유린당해 아픈 상처를 안고 돌아온 우리를 죄인으로 내모는 유림을 규탄합니다. 향교를 태워버려라. 우리는 끝까지 향교를 불태우고 싸울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정조를 잃은 더럽힌 몸으로 돌아온 여인들이 뭐가 잘났다고 성리학의 근간을 흔드는 망국 행위로 나체시위를 하고 향교에 불을 지르는데 이런 범인을 잡아 극형에 처해야 마땅한 줄 압니다.”
당황한 인조 임금이 영의정 최명길을 불러 질타하였다.
“환향녀들이 향교에 불을 지른 것은 유림이 그녀들을 박대했기 때문입니다.”
“방화는 그냥 둘 수 없는 일이잖소.”
“가정에서 쫓겨난 환향녀들은 홍등가에서 술 파는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유림들이 만든 굴레 때문에 억울한 생을 살게 된 거죠. 그래서 속옷 바람으로 궐기를 하며 유림에 복수하는 의미로 향교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조정 대신들과 유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영의정 최명길은 6부 판서를 불러들여 시국 난제를 토론하였다.
“여러분의 잘못으로 인질로 잡혀간 환향녀들은 당장 회절 복권을 시켜야 합니다”
최명길의 설득에도 유림들은 화냥년들의 복권을 방해하였다. 화냥녀들이 계속 전국의 향교에 불을 질렀다. 이를 방관할 수 없어 인조 왕이 나섰다.
“향교에 불을 지르는 자는 극형에 처할 것이다. 거리에서 시위하는 환향녀들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
한춘옥은 일단 시위를 중단하고 새로운 행동 강령을 내렸다. 기생옥에 출입하는 사대부나 유림의 선비들을 패가망신시키는 방법이었다. 기방에서 술값과 화대를 외상으로 하는 사대부나 선비의 명단을 공개하고 그들 집으로 찾아가서 술값을 받아냈다. 한춘옥은 더 나아가서 유림과 지방 관리의 비리를 폭로하고 콧대 높은 관리들의 비행을 상소하였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