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충만,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의 신학적 통찰을 통해 골로새서의 핵심 주제인 그리스도론을 심층 분석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이 고대의 혼합적 오류와 현대의 세속주의를 교정하는 해답임을 설명하고, 골로새서 3–4장의 오이코스 윤리와 동역자 네트워크가 오늘의 교회와 일상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골로새서는 신약성경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론의 심장부를 통과하는 서신으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단지 교리의 항목이 아니라 신앙과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결정적 인식으로 끌어올린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정적 인식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열어 보이며, 고대의 철학·종교적 혼합주의와 현대의 세속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교회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닻은 여전히그리스도의 충만이라고 반복해서 증거한다. 그의 시선에서 골로새서는 위기의 원인을 장황하게 논증하기보다, 1장에서 먼저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장엄한 고백을 던져 교정의 방향을 선명하게 정렬한다. 그리스도는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 1:15)이자 만물의 창조·존속·화해의 중핵이시며,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 2:9)이다. 문제 제기보다 선제적인 해답의 선포가 우선한다는 이 역행적 배열은,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모든 교정은그분이 누구신가에 대한 바른 고백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골로새의 위기는 흔히 영지주의로 뭉뚱그려 언급되지만, 보다 정확히는 유대적 전통과 금욕주의, 천사 숭배적 경향, 그리고 헬라철학적 사유가 뒤섞인 혼합적 오류였다고 보는 편이 학술적으로 균형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간파한 채, 고대의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삶에서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사상적 경향을현대판 영지주의로 명명한다. 물질과 성과, 자아 최적화, 이념적 정체성이 궁극적 의미를 대리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불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끝없이추가적인 무언가를 소환하지만 공허는 더 깊어질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반복되는 결핍의 경제를 돌파하는 길로그리스도의 충만,” 곧 플레로마를 제시한다. 골로새서의 플레로마는 중간적 영적 존재들의 연쇄를 통해 신성에 접근한다는 가설을 단호히 거부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충만을 한 인격, 한 사건, 곧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친히 담아 내셨다는 급진적 선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더 높은 비밀지식이나 더 철저한 금욕 혹은 더 까다로운 의식에 있지 않고, 이미 우리 가운데 오시고 우리와 연합하시는 그리스도께 있다. 장재형목사는추가의 집착에서충분의 평안으로 이동하는 이 신학적 전환이 신앙·윤리·공동체 전 영역을 재배열한다고 역설한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추상적 명제가 아니다. 바울은 2장에서 골로새 성도들이그 안에 뿌리를 박음으로써 철학과 헛된 속임수,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게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2:6–8). 장재형목사는 여기서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음을 기준으로 참·거짓 경건을 분별한다. 천사 숭배, 계시 체험의 과시, 금욕적 엄격함은 그럴듯한 신앙의 외형을 제공하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느슨하게 만드는 순간 생명은 말라버린다.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충분하다는 복음의 감각을 회복한 사람은 더 많이 얻으려는 초조함보다 더 깊이 뿌리내리려는 평정으로 옮겨 간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평정이 공동체의 윤리를 낳는다고 본다. 신학이 윤리를 낳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체가 삶의 재편성을 밀어 붙인다.


그래서 3장으로 넘어오면, “위의 것을 찾으라”( 3:1)는 명령은 도피적 경건이 아니라 현실 재배치의 선언으로 들린다. 장재형목사는위의 것을 일상 회피의 구호가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좌표의 변환으로 읽는다. “는 장소가 아니라 주권이다.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새 사람을입는운동이 시작될 때, 사회가 계약·권리·기능으로만 이해하던 관계는 헌신·존중·상호성의 언어로 재구성된다. 골로새서가 제시하는 오이코스 윤리는 이 점에서 혁명적이다. 당시 가정 규범은 대체로 권력의 일방향 흐름을 고착했지만, 바울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말을 건다. 아내에게, 자녀에게, 종에게 먼저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순서에 주목한다. 이것은 복음이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약자에게 순종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초를섬기는 자에게서 발견한다는 신학적 역설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섬김은 굴종이 아니라 주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가 삶으로 번역되는 방식이며, 그래서주께 하듯이라는 구절은 오이코스 윤리 전체의 열쇠가 된다( 3:18–24). 종의 노동은 더 이상 사람의 눈가림을 위한 효율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를 향한 예배가 된다. 동시에 상전에게도의와 공평이라는 표준이 제시된다( 4:1).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바울의 윤리를 구조 옹호로 축소하는 오해를 경계한다. 제도 자체를 즉각 폐지하진 않지만, 복음은 주권의 자리배치를 바꾸어 놓는다. 모든 관계는 주 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다시 계산되고, 권력은 책임으로 번역되며, 노동은 존엄으로 해석된다. 그러니 오늘의 직장·조직·학교에서도 그리스도인은주께 하듯일하며, 동료를 성과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케노시스의 영성을 강조한다. 자기를 비워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방식이야말로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우는 실제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골로새서의 결말부는 한층 입체적이다. 많은 독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4장의 인명 목록은 사실상 복음의 동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지도다. 두기고는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으로서 편지의 전달자이며 소식을 전하는 해석자다( 4:7–8). 에바브라는 골로새·라오디게아·히에라볼리 교회를 위해 애써 기도하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는 목자의 모델이다( 4:12–13). 오네시모는 도망 노예에서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 4:9)로 호명되는 존재론적 전환의 증언이며, 바울은 개인 서신인 빌레몬서를 통해 주인과 종의 관계를 복음 안에서 형제 관계로 해석하도록 요청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서사가 단지 개인의 회심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적 신분 질서를 복음의 언어로 바꾸는 급진적 모형이라고 본다.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모가 훗날 교회의 중요한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잃어버린 한 영혼이 공동체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비유다. 마가는 과거의 두려움과 실패를 넘어 다시 바울 곁에서위로가 되었다( 4:11). 장재형목사는 이 회복의 흔적에서, 교회가 실패자를 낙인찍어 배제하기보다 은혜로 다시 세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목회적 윤리를 읽어낸다. 누가는사랑받는 의사로서 지성과 돌봄의 결합을 보여주는가 하면, 데마의 이탈(딤후 4:10)은 신앙의 길이 얼마나 실제의 유혹과 싸움으로 가득한지 상기시킨다. 나아가 바울은 눔바(사본에 따라 눔파로도 표기)와 그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며, 아킵보에게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권면한다( 4:15, 17). 이 세심한 주목은, 장재형목사가 추구하는 목회가 추상적 비전이 아니라 얼굴과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닿는 돌봄이라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4:16의 회람 명령이다. 골로새 교회뿐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이 편지를 읽고,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도 읽으라는 요청은, 진리가 한 교회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교회의 자산임을 천명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의 연합과 네트워크를 사도적 사명의 핵심으로 재확인한다. 두기고와 같은 메신저, 에바브라와 같은 개척자, 오네시모와 같은 회복의 증인을 세우고 연결하는 일은 프로그램 이전에 복음 자체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그의 목회 비전은 동역을 조직론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충만을 중심에 고정할 때, 동역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생태계가 된다. 각 교회가 진리 안에서 서로의 편지를 읽고 배우고 도우며, 지교회는 공교회성 속에서 더 건강해진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세계선교의 유기적 네트워크이며, 단절과 분절로 지친 현대 교회에게 제시하는 회복의 경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오직 그리스도라는 구호는 단순하고 반복적이어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빈약함이 아니라 밀도에서 나온다. 그는 니케아(325)와 칼케돈(451)의 고백,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그리스도의 신비가 교리사의 박물관에 갇힌 문장이 아니라, 교회를 오늘도 보호하고 양육하는 생명의 울타리임을 설득한다. 가현설이든 아리우스주의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를 약화시키는 모든 변형 복음은 결국 구원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신성만 남기면 추상적 이상이 되고, 인성만 남기면 위대한 스승 이상의 의미를 잃는다. 장재형목사는 칼케돈의 균형이 바로 목회의 균형이라고 말한다. 초월의 영광과 임재의 친밀이 동시에 살아 있을 때, 예배는 하늘을 향해 열리고 일상은 땅에서 변한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교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공동체가 서로를 품고 세우는 능력으로 검증된다.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예수는 누구인가?” 골로새서는 이 질문에모든 것의 중심이며, 교회의 머리이시며, 화해의 근원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인다. “그분은 교정의 기준이자 능력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흔들릴수록, 더 복잡한 해법을 찾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정체를 선명히 고백해야 한다. 위기가 커질수록 해답은 더 단순해진다. 장재형목사의 설교와 글은 이 단순함의 힘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 서도록 하신다는내재의 연쇄를 따라가면, 신앙은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삶을 견고하게 세우는 구조가 된다. 학생이 공부와 진로의 압박 속에서 흔들릴 때, 직장인이 성과의 사다리 위에서 소진될 때, 부모와 자녀가 기대와 좌절의 간극에서 상처 입을 때, 공동체가 갈등과 피로로 분열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치사는 길을 잃은 인간 질서에 방향을 준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정체성을 받고, 그 안에서 서로를 대하고, 그 안에서 일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골로새서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실제적인 목회적 지침이라고 말한다.


실천의 층위에서 보자면, 기도와 말의 재구성이 출발점이다. 바울은전도의 문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하며( 4:3), “세월을 아끼라는 권면으로 시간을 구속하라고 촉구한다( 4:5). 장재형목사는 이 두 구절을 개인 경건과 공적 지혜의 쌍두마차로 제시한다. 기도는 길을 만들고, 지혜로운 말은 길을 낭비하지 않는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르는 경계가 희미해진 시대에, 은혜로운 말과 소금 같은 맛은 곧 신자의 공적 윤리다( 4:6). 분노와 냉소가 조회수를 모으는 구조에서, 은혜의 언어는 비효율처럼 보이지만 결국 관계를 지키고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의 충만을 소환한다. 충만을 경험한 사람만이 결핍으로 말하지 않고 은혜로 말한다. 기도가 닫힌 문을 여는 힘이라면, 말은 열린 문을 통해 복음이 오해 없이 통과하도록 돕는 지혜다.


골로새서는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4:18)는 짧은 서명으로 끝난다. 쇠사슬은 바울의 몸을 묶었지만, 복음의 길은 오히려 더 멀리 열렸다. 장재형목사는 이 역설에 눈을 고정한다. 교회의 약함과 제약, 시대의 체제와 구조는 복음을 가둘 수 없다. 오히려 그 제약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이 드러난다. 약함이 은혜의 무대가 되고, 사슬이 복음의 표지가 되는 순간, 공동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시 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골로새서를위대한 교정이라고 부르며, 이 교정을 오늘에 구현하는 일을 목회와 신학의 중심 과업으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충만을 회복하고, 오이코스에서 새 삶을 실천하고, 동역의 네트워크로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일,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교회의 길이다. 복잡한 전략보다 분명한 중심이 더 멀리 간다. 이 초점이 선명해질 때,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도적 사명을 담대히 이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골로새서의 오래된 고백은 오늘의 문제들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해답으로 빛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충만 안에, 교회의 미래가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을 성경의 증언과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동시에 증거하며, 독자들을그분 안에서다시 시작하도록 초대한다.


davidjang.org
작성 2025.11.01 21:48 수정 2025.11.0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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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