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의 골로새서 1 24-29절 강해. 사도 바울이 기뻐한 고난의 의미와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합니다. 교회의 일꾼 된 청지기직(경륜)과 만세에 감추인 비밀인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이 어떻게 성도의 삶과 사역의 동력이 되는지 조명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과 삶이 가장 밀도 있게 맞닿는 대목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골로새서 1 24-29절을 떠올릴 것이다. 짧은 여섯 구절 안에 바울의 자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해, 교회의 정체성, 복음 사역의 구조, 성도의 소망과 동력까지 핵심적인 뼈대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단을 바울 신학의 관문처럼 읽어내며, 23절에서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는 자기 정체성의 고백이 24절의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는 역설적인 선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특별히 주목한다. 그에게서 고난은 무의미한 소모가 아니라 영광으로 가는 길이며, 로마서 8 18절의 말처럼 앞으로 드러날 영광과 비교할 때 현재의 권한은 과소평가되어야 마땅한 성격을 지닌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직접 세우지 않았음에도 감옥에서 그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관점 때문이다. 그는 고린도후서 1 9절에서 고난의 자리에서 자기 의지의 한계를 깨닫고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되었음을 고백한다. 4 8-9절에서 사방으로 몰려도 무너지지 않고, 답답한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는 태도를 밝히는데,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를 현실을 회피하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한 메시아의 길을 제자도 안에서 받아들이는 신학적 성숙이라고 설명한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구속사적 시야 덕분이었다.


이 관점은 24절 후반부의 난해한 표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에서 정점을 이룬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남은 고난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분의 속죄는 단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졌으며, 죄 사함을 위해 더 보탤 것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 있는가. 신학자들이 지적하듯, 바울이 사용한 동사채우다’(νταναπληρόω)는 속죄의 결핍을 보충한다는 뜻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로 열어놓으신 구속의 효력이 교회라는안에, 그리고 역사 속 열방에게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몫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구속을적용하고전달하며 교회를 세우는 시간 속 사명적 고난이 남아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 12절이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한다고 말하듯, 사역자의 희생은 성도들에게 생명이 흘러갈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교회에게 위임된 산고(産苦)”로 풀이하며, 신자가 감당하는 오해와 박해, 인내와 눈물이 구속사 안에서 새롭게 의미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에게 고난은 징벌이 아니라 양육이고, 낭비가 아니라 씨 뿌림이며, 패배가 아니라 성숙으로 가는 통로였다.


25절에서 바울은 자신을교회 일꾼이라 부른다.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 διάκονος(diakonos)는 단순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원래는 식탁을 섬기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시중드는 이라는 뜻에서 출발했지만, 초대교회 문맥에서는 위탁받은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청지기의 뉘앙스를 함께 품는다. 바울은 자신이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οκονομία, oikonomia)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한다고 말한다. 여기서경륜은 주인의 뜻에 따라 집안을 돌보는 청지기의 책임을 떠올리게 한다. 바울이 말하는말씀을 이루다’(πληρσαι τν λόγον το θεο)는 말씀 자체에 결핍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의 충만이 사람과 공동체, 문화와 역사 속에 넓고 깊게 스며들도록 전달되고 해석되고 체화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사역의 기준을 성과나 규모에 두기보다, 맡긴 것을 맡긴 방식대로 돌려드리는 청지기의 충성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청지기직의 핵심은주인의 뜻주인의 방식에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난 수용은 무모한 자기 소모가 아니라, 맡겨진 경륜의 질서에 순복한 합리적 순종이다.


26절로 넘어가면 바울은 자신이 이루려는하나님의 말씀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비밀(μυστήριον, mysterion)”로 규정한다. 이 비밀은 소수만 아는 비법이나 영적 신비주의가 아니다. 때가 차기까지 잠시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 갈라디아서 4 4절이때가 차매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고 말하듯, 십자가와 부활 사건 안에서 비밀의 문이 실제로 열렸고, 예언과 상징의 수수께끼였던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명료해졌다. 욥기 42 5절의 고백,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가 암시하듯, 신앙은 관념적 동의에서 인격적 만남으로, 정보의 수집에서 실재의 체험으로 이동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나타남이 주는 감격을 잊지 말라고 권한다. 복음은 열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사건이며, 신자에게는 그 사건이 삶 전체를 다시 조직하는 중심추가 된다. 바울의 열정은 바로 이 사건의 감격에서 분출했다. 그래서 그는 상황의 파도에 휩쓸리는 표류자가 아니라, 역류를 거슬러 오르는 순례자로 서 있을 수 있었다.


27절은 비밀의 대상과 내용, 그리고 그 풍성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구속의 이야기는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깊은 계획 속에서 이방인에게로 넓어졌다. 초대교회의 긴장과 갈등, 거부와 수용의 과정을 지나 결국 복음은 국경과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밀의 핵심이지식이 아니라인격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비밀은 우리 바깥의 정보가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 자신이다. 그분이 내주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신자는 현재의 현실이 얼마나 어둡든 장차 완성될 영광을 단지 미래의 약속으로만이 아니라 현재의 소유로도 붙든다. 여기서 소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인격적 임재에 근거한 확신이며, 그 확신은 정체성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새롭게 잡아 준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죄 사함을 설명하는 교리 이상의 것이다. 연합은 우리의 가치관과 윤리, 관계와 업무, 학업과 진로의 결까지 변형시킨다. 장재형목사는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인식이 신자의 모든 선택의 출발점이자, 흔들릴 때마다 되돌아갈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적 현실은 즉시 외적 사명으로 이어진다. 28절에서 바울은우리가 그를 전파하여라고 말한다. 좋은 소식은 본성상 퍼져 나간다. 그러나 바울은 전파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 그 목적은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τέλειος, teleios)로 세우는 것이라고 밝힌다. 세 번 반복되는각 사람은 교회 사역의 단위가군중이 아니라인격임을 못 박는다. 권면과 가르침이 함께 등장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권면 없는 가르침은 추상으로 흐르고, 가르침 없는 권면은 일시적 위로로 끝나기 쉽다.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청중은 정보의 창고가 아니라 성숙을 향한 길 위에 선다. ‘완전함’(teleios)은 흠이 없다는 의미라기보다, 목적에 맞게 잘 자라난 상태를 가리킨다. 교회 교육과 제자훈련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바로 이 성숙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목표가 오늘의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강의실과 연구실, 실험실과 스튜디오, 회의실과 가정에서도 똑같이 유효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다양한 모임과 교육 현장에서 경험한 기쁨을 떠올리며, 영혼을 세우는착한 일이 바울이 맛본 기쁨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증언한다. 사람의 변화에서 오는 기쁨은 숫자의 증가에서 오는 만족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교회는 프로그램보다 사람을, 이벤트보다 성숙을, 확장보다 충만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29절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을 밝힌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여기서능력역사는 감정의 고양이나 의지의 결연 같은 심리적 상태가 아니다. 헬라어 νέργεια(energeia)는 성령의 실제적 작용을, κόπος(kopos)는 땀과 눈물이 배인 수고를 가리킨다. 주도권은 성령께 있으나, 인간의 몸과 의지는 그 역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바울은 조용히 기다리는 수동성(quietism)과 무한한 활동성(activism) 사이에서따라 수고한다는 길을 택한다. 로마서 8 9절과 고린도전서 3 16절은 성도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약속된 보혜사는 신자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며, 기억나게 하고 가르치며 담대하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내주하심을 잊을 때 신앙은 도덕주의로 기울고, 자기 확신 아니면 자기 연민으로 흔들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내주하심을 기억할 때, 죄와 싸우는 힘과 사명을 감당할 끈기가 함께 공급된다. 그래서 바울의 수고는 번쩍했다가 금세 꺼지는 불꽃이 아니라, 성령의 호흡에 맞춘 지속 가능한 호흡처럼 이어진다.


이제 이 여섯 구절이 그려내는 큰 그림을 하나로 엮어 보자. 바울은 복음의 일꾼으로서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 고난은 속죄의 부족분을 메우는추가 비용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구원이 역사 속 사람들에게 실제가 되도록 교회에게 맡겨진 사명적 고난이다. 그는 청지기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이루기위해, 곧 말씀의 충만이 사람과 공동체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드린다. 그가 이루려는 말씀은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이자 이제 드러난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이 내주의 비밀은 우리의 정체성과 소망을 새롭게 정의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쳐 성숙으로 이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수고의 동력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이러한 구조는 1세기의 사도에게만 주어진 청사진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도 동일한 구조 안에서 존재하고, 동일한 호출을 받는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구조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우선 고난을 피하거나 낭만화하려는 두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한쪽에는 불편과 손해를 철저히 회피하려는 태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고난 자체를 미화하며버티는 나를 자랑하는 태도가 있다. 바울은 두 길 모두를 거부한다. 그는 고난을 도망치지 않되, 고난을 자기과시의 무대로 삼지도 않는다. 고난을 교회론적이고 선교적인 관점으로 다시 배치한다. 그때 고난은 억지로 참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을 학습하고 기쁨을 깊게 만드는 시간으로 달라진다. 다음으로각 사람에 대한 집착을 회복해야 한다. 군중을 감동시키는 이벤트를 잘 만드는 것과, 한 사람을 성숙으로 이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권면과 가르침이 통합될 때, 학생은 지식의 수혜자가 아니라 삶의 참여자가 된다. 대학교의 강의실에서라면, 전공 지식과 복음의 지혜가 서로를 밀어내는 경쟁자가 아니라 상호 번역자처럼 만나야 한다. 과제의 마감과 경건의 습관도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성령의 에네르게이아에 호흡을 맞춘다면, 공부와 기도가 서로를 응원하는 팀이 될 수 있다. 직장에서는 성과와 소명이 분열되지 않도록청지기의 관점을 적용해야 한다. 성취는 중요하지만, 그 성취가 주인의 뜻과 방식에 부합하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자녀를 성취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이름을 가진각 사람으로 존중하며 권면과 가르침을 함께 세워야 한다. 교회는 프로그램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회중의 크기에서 성숙의 깊이로, 일회성 행사에서 장기적 제자화로 중력을 옮겨야 한다.


이 모든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라는 고백이다. 소망은 전망이 아니라 임재에서 나온다. 임재가 확실할수록 방향은 분명해지고, 방향이 분명할수록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그래서 바울은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힘은 무한한 체력에서 나오지 않고, 내주하시는 이의 역사에서 흘러나왔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독자들, 특히 대학생과 청년들에게 이 고백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말하라고 권한다. 맡겨진 자리에서 청지기로 서고, 각 사람을 이름으로 기억하며, 권면과 가르침을 통합하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호흡에 보폭을 맞추라. 그 길 위에서 고난은 도피의 대상이 아니라 동행의 기회가 되고, 수고는 허비가 아니라 사랑의 표지가 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약속된 영광이 있다. 그 영광의 이름이 곧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 안에 계신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충분한 이유가 되고, 충분한 위로가 되며, 충분한 동력이 된다. 그렇게 바울의 길은 우리의 길이 된다. 그렇게 교회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도 한결같이 복음의 일꾼으로 서게 된다.

 

davidjang.org
작성 2025.11.03 14:48 수정 2025.11.0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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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