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토대로 장재형목사 메시지의 핵심인 성화·형제 사랑·가정의 거룩·조용히 일하는 신앙을 대학생 눈높이로 풀어낸 신학 에세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펼치면 “끝으로”라는 단어가 먼저 시선을 붙잡는다. 마지막에 덧붙인 권면이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본론의 핵을 드러내는 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미 3장까지 데살로니가 교회를 따뜻하게 칭찬하고 사랑으로 격려했지만, 여기서는
신자들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삶의 방향을 분명히 한다.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온 관점으로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신앙은 단지 감정의 고양이나 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평생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유지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더 선명해진다. “너희가 어떻게 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배웠다면 행하고, 행한다면 더 힘쓰라는
이 간단한 구조가 신자의 일상 전체를 지배하는 리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추상적 표어가 아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이 말하듯,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신다는 믿음은 도피의 주문이 아니라 행동을 개시하는 토대다. 요한복음 21장의 장면도 이를 뒷받침한다. 주께 대한 사랑 고백은 반드시 양을
먹이라는 사명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감정에서 머물지 않고 사명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하늘을 이고 사는 삶”이라는 표현으로, 머리 위에 하나님의 뜻을 얹고 그 무게를 의식하며
하루를 버티는 태도를 설명해 왔다. 이 뜻의 요약이 바로 바울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
구원론의 문장으로 정리하면 순서는 분명하다. 칭의로 시작해 성화로
이어진다. 로마서 1–4장은 칭의의 논증을, 5–8장은 성화의 지형도를 그린다. 의롭다 함은 믿음으로, 거룩해짐은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고백은 그리스도교의 고유함을 이룬다. 성화는
인간이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도덕 수양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와 조명이 죄의 권세를 이기게 하며 욕망과
습관의 구조를 새롭게 짜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일회적 충동이 아니라 평생의 훈련이고, 바울이 “더욱 많이 힘쓰라”고
덧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룩의 최종 목표는 예배의 언어로 압축된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온 피조세계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반복하는 장면은 신앙의 종착지를 보여 준다. 예배의 중심 언어가
거룩이라면, 신자의 삶 역시 그 언어를 향해 수렴해야 한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신을 벗는 장면은 거룩의 원초적 정의를 제공한다. 구별됨. 세상을 경멸하며 도피하는 폐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따로
세우는 의식이다. ‘바리새’라는 명칭의 어원이 ‘분리된 자’라는 사실도 같은 점을 가리킨다. 거룩은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장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한 내면의 구획을 만들고, 그 구획이 다시 이웃에게 향하는 태도를 바꾸는 질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첫 번째 현실 적용은 음란을 버리라는 촉구다. 고린도전서 5장이 적나라하게 보여 주듯, 공동체는 언제든 세상의 묵은 누룩을 흡수할 수 있다. 바울의 시선에서
음란은 사적인 도덕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누룩처럼 온 덩어리를 바꾸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을 떠난 영적 간음이 우상숭배로, 그리고 육적 간음으로 이어지는 타락의 경사를 묘사한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눈과 손과 입을 타고 들어오는 자극과 모방의 알고리즘이 신자의 감각을 포획한다. 보는 것을 길게 보고, 손으로 저장하고 전송하며, 입으로 확산하는 습관이 마음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예수는 범죄케
하는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버리라는 과감한 과장법으로 타협의 여지를 없앤다. 파괴를 권하는 말이 아니라
결단의 급진성을 비유한 말이다. 감각의 루틴을 바꾸지 않고 거룩을 말할 수는 없다.
귀의 훈련도 빠질 수 없다. ‘聖’
자에 귀(耳)와 입(口)이 들어 있듯, 말씀이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가는 길에서 거룩은 자란다. 말씀을 듣는 루틴이 없으면, 다른 소음이 신앙의 내실을 잠식한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말씀으로 통로를 바꾸라”고 권한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되새기는가가
곧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해 가는지를 결정한다.
바울은 이어 가정의 성화를 말한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를 대하라.” 고대 사회에서는 아내가 쉽게 내쳐질 수 있었고 남편만 존귀를 인정받기 쉬웠다. 그런 배경에서 아내를 존귀로 대하라는 권면은 급진적이다. 에베소서 5장이 말하는 상호성—아내의 존중과 남편의 희생적 사랑—은 결국 십자가 사랑의 가정화다. 이 대목에서 거룩은 종교적 태도에
머물지 않고 관계의 질서를 재배치한다. 존귀라는 말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정서가 아니라, 상대의 경계를 지켜 주고, 비교의 언어를 삼가며, 희화화를 명랑함으로 포장하지 않는 구체적 습관으로 증명된다.
또한 바울은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 “주께서
신원하신다”고 덧붙인다. 신원(伸寃)은 억울한 자의 탄식을 듣고 사건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사법적
자비를 뜻한다. 종교적 열심이 오히려 타인을 도구화하고 상처 입히는 모순을 낳을 수 있음을 그는 안다. 그러므로 성화는 사적인 경건의 향기가 아니라, 약자와 피해자를 안전하게
하는 질서다. 거룩의 공공성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정의와
자비는 개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체질이다.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저버림”이라는 경고도 뼈아프다. 헬라어 ἀθετέω(atheteō)는 ‘무시하고 지나치다’, ‘지워 버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배운 말씀을 메모에 남겨 두고 삶의 메모리에는
기록하지 않을 때, 우리는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밀쳐낸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종말론적 열정이 뜨거운 공동체일수록, 일상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는 유혹이 더 거세다. 바울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요구한 까닭은, 열정을
낮추려는 게 아니라 열정의 방향을 삶의 현장으로 수렴시키려는 의도다. 그는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까지 말한다. 종말을 산다는 말은 손을 멈춘다는 뜻이 아니라, 종말의 빛으로 오늘의
노동을 정직하게 비춘다는 뜻이다.
형제 사랑에 대해 바울은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고 한다. 데살로니가, 빌립보, 베뢰아로 대표되는 마게도냐 교회들이 그 증거다. 가난했지만 스스로를
비우며 넘치는 연보를 했다. 반대로 부유했던 고린도는 자주 망설였다.
은혜의 역설은 여기에서도 작동한다. 많음이 능력이 아니라 비움이 능력이라는 사실. 채움으로 풍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 넉넉해지는 길. 장재형목사는
이 대조를 오늘의 아시아 교회들에도 적용해 왔다. 서로 다른 언어와 제도, 자유의 정도가 다른 현실 속에서도 형제 사랑은 국경을 너머 연결된다. 사랑은
프로그램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방식으로 흐른다.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라”는 권면은 공적 얼굴의 문제다. 종말론적 열정이 강할수록 세상을 향해
교만해지기 쉽다. 단정함은 위축이 아니라 품격이다. 신자가
사회와 맺는 접촉면에서 예의와 신뢰를 세우는 일은 복음의 내용을 왜곡 없이 전달하는 통로다.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영어
번역 중에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옮긴
문장이 있는데, 이것이 의존 자체를 낙인찍으려는 뜻은 아니다. 도움을
받는 자리에만 머물지 말고, 도움을 건네는 자리에 서라는 권면이다. 손으로
일하는 자립이 사랑의 확장을 위한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학생의 자리에 이 메시지를 대입해 보면 더욱 구체적이다. 학점과
스펙, 관계와 진로 사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의식적으로 앞세우는 훈련은 선택지를 좁히기보다 목표를 선명하게 한다. 시험 기간의 몰입과 예배의 정직함이 충돌한다고 느껴질 때,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는 권면은 공부를 경건의 일부로 끌어온다. 연애와
성윤리의 경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눈–손–입’의 질서를 훈련하지 않고 사랑을 말하면, 사랑은 금세 즉흥에 휩쓸린다. 스크롤의 속도를 줄이고, 노출의 강도를 낮추며, 반복 소비 대신 말씀 듣기의 루틴을 복원하는
작은 습관이 성화의 코어 근육을 만든다. 말씀이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가 이웃을 세우는 언어로 변할
때, 우리 안의 거룩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자란다.
가정에 대한 권면도 오늘의 현실에 맞닿아 있다. 배우자를 존귀히
대한다는 말은 결혼한 이들만의 윤리가 아니다. 연애의 언어부터 존귀를 문법으로 배우지 않으면 결혼의
대화가 거칠어지기 쉽다. 상대의 경계를 존중하고, 비교의
말을 삼가며, ‘웃음’을 빌미로 상처를 정당화하지 않는 작은
절제는 성령의 열매와 만난다. 이런 미시적 윤리가 결국 교회의 공기를 바꾸고, 교회는 다시 사회의 공기를 바꾼다. 마게도냐 교회의 사례가 이를
증언한다. 사랑은 모자람의 경제에서 증식했고, 그 증식은
예루살렘의 기근 한복판으로 흘러 들어갔다. 오늘 우리가 같은 상상력을 품는다면, 사랑은 제도보다 빨리 국경을 넘어갈 것이다.
남는 것은 한 가지 질문이다. “나는 지금 거룩해지고 있는가.”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상기(常記)의 루틴이 필요하다. 아침에는 본문 한 절을 소리 내어 읽고, 낮에는 짧은 묵상 한 줄을 떠올리며, 저녁에는 감사 한 문장을 적어
보는 일. 성화는 단번의 결심이 아니라 길게 유지되는 작은 리듬들의 합이다. 바울의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은 속도를 올리라는 촉구가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은 꾸준함을 요청하는 지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목표가 선명하다면, 오늘의 선택은 내일의
습관을 만들고, 내일의 습관은 공동체를 살리고, 공동체의
질서는 세상을 설득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그 전체 과정을
한 호흡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장재형목사는 이 호흡을 오늘의 문장과 동아시아의 맥락 속으로 옮겨 온
증언자다. 하나님의 기쁨을 향한 방향, 성령으로 거룩에 이르는
과정, 형제 사랑과 조용한 노동으로 드러나는 표지. 이 세
가닥을 놓치지 않는다면 종말론적 열정은 공허한 소음이 아니라 선한 에너지로 순환할 것이다. 그 에너지는
가정과 교회, 교회와 도시, 도시와 열방으로 파문처럼 번져
나갈 것이다. 결국 우리의 길은 이 이름으로 수렴된다. 거룩. 그리고 그 거룩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유일하고도 충분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