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춤이 없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고 노래가 없는 시(詩)는 시가 아니다.”라는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1885-1972)의 말처럼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우리 동양의 육십갑자 지지(地支) 가운데 쥐띠가 왜 제일 먼저일까? 병자년 1936년생 쥐띠로서 나는 자문해 본다. 쥐는 가장 영리한 동물이라고 생물학자들은 말한다. 유사 이래 인류와 쥐 사이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데, 쥐를 잡기도 어렵지만, 온갖 쥐약조차 큰 효력이 없어 쥐가 독약을 먹고도 생존하는 확률이 높고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란다.
또한 쥐의 번식률이 놀라워 인간이 쥐를 잡아 죽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새끼를 치는데, 암컷 한 마리마다 일 년에 네 번씩 한 번에 다섯 마리부터 스물한 마리까지 낳고, 이 새끼들은 또 제각기 4개월이면 제 가족을 갖게 되며 이들의 새끼들은 4개월 후엔 또 다른 새끼들을 친다고 한다. 따라서 뉴욕만 해도 뉴욕 인구와 맞먹는 숫자의 쥐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쥐를 이용, 전 유럽에 전염병을 퍼뜨릴까 봐 걱정했듯이, 9·11사태 이후 미국 정부는 알카에다가 쥐를 통한 병균을 확산시킬 것을 우려해 전전긍긍했었다.
그래서일까. 미국의 1962년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은 그의 작품 ‘생쥐와 인간’에 등장하는 인물 레니를 통해 우매한 인간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은 자기 집과 농장을 갖겠다는 단순한 꿈을 좇는 두 떠돌이 일꾼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조지와 거인의 몸을 가졌으나 어린애의 두뇌를 갖고 사고만 치는 레니가 오페라 막이 오르면서 경찰로부터 쫓기고 있다. 둘 사이가 언제나 그렇지만 조지는 화를 내고, 기분이 상한 레니 는 불퉁스럽다가 둘은 화해한다. 귀여워하다가 죽인 생쥐 한 마리를 레니로부터 조지가 빼앗아 던져버리자 레니는 항의한다. 쓰다듬을 수 있는 부드러운 것들을 그는 사랑한다면서. 그러자 조지는 레니를 달랜다. 앞으로 다른 애완동물을 구해주겠다고.
그 후로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기르게 되는데 레니는 또다시 부주의로 그 강아지를 죽게 한다. 그뿐더러 그는 농장주의 바람끼 있는 아내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다 그만 그녀까지 죽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레니가 기다리던 조지가 나타나자 둘 사이의 화내고 삐치고 화해하는 의식적인 순서를 밟은 후, 목장주와 일꾼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놀라는 레니를 조지가 안심시킨 다음, 어차피 그들에게 사형당해 죽임을 당하기 전에 조지가 레니를 총으로 쏴 죽인다.
둘이 꿈꾸던 집과 농장이 저 멀리 보인다고 레니가 상상하는 순간에 총소리를 듣고 농장주와 일꾼들이 몰려오면서 막이 내린다. 여기서 레니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지 않을까. 뭔가를 또는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대상을 죽이고 마는 우리 자신들을 말이다.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를 질식시키고 만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리라. 부모자식, 부부, 애인, 친구 간에는 물론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아, 그래서 예부터 우리말에 과유불급이라고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무조건 사랑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면 우주의 축소판인 나 자신부터 자중자애함으로써 온 우주 만물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는 코스미안의 사랑을 해보리라.
한번 생각해 보자. 짝사랑과 스토킹의 차이가 무엇인지. 짝사랑은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것이지만 스토킹은 상대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청소년 시절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읽다가 그 작품 속의 주인공 오셀로가 그의 부인 데스데모나를 의심하면서 증오와 질투심에 불타 아내를 목 졸라 죽인다. 그러면서 ‘그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나는 그 오셀로의 그 괴변에 펄쩍 뛰었다. 사랑은 무슨 사랑인가. 오셀로의 행위는 사랑과 정반대 짓이다. 사랑이라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진실을 더할 수 없이 모독하고 모욕한 어불성설이다.
젊은 날 미국 음악영화 ‘로즈마리’를 보다가 그 끝 장면에 무릎을 치면서 스토리의 결말이 좋아 나는 쾌재를 불렀다. 백인 기마대가 어느 인디언 원주민 부락을 습격,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죄다 학살했는데 한 어린 소녀가 살아남은 것을 이 기마대 상사가 거두어 자식같이 키웠다. 이 아이가 커서 아리따운 처녀가 되자 상사는 이 처녀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처녀는 상사 아저씨를 생명의 은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하면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상사 아저씨가 원하면 그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던 어느 날 처녀는 뜻밖에 어떤 젊은 사냥꾼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다. 상사 아저씨를 저버리고 젊은 사냥꾼을 따라갈 수 없어 고민하는 처녀를 상사 아저씨가 제일 좋은 말에 태우고 그 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 쳐서 처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냥꾼에게 보내준다.
3대 독자에다 유복자로 태어나 자식을 열다섯이나 보신 나의 아버지는 우리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 우리 자식들뿐만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을 아낌없이 사랑하시어 동요와 동시, 그리고 아동극본을 저술해서 일제강점기 때 우리말로 ‘아동낙원’이라는 책을 자비로 500부 출간하셨다. 그런데 단 한 권 남아 있던 것마저 6.25 전쟁 때 없어지고 말았다. 글을 처음 배우면서 읽은 ‘아동낙원’ 속의 ‘금붕어’란 동시 한 편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비 오는 날, 어항 속 금붕어를 들여다보면서 어린아이가 혼잣말하는 내용이다.
헤엄치고 늘 잘 놀던 금붕어 네가
웬일인지 오늘은 꼼짝않고 가만 있으니
너의 엄마 아빠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 모두
보고 싶고 그리워 슬퍼하나 보다.
저 물나라 네 고향 생각에 젖어
밖에 내리는 빗소리 들으며
난 네가 한없이 좋고 날마다 널 보면서
이렇게 너와 같이 언제나 언제까지나
한집에 살고 싶지만 난 널 잃고 싶지 않고
너와 헤어지기 싫어 난 너와 떨어지기가
너무 너무나 슬프지만 정말 정말로 아깝지만
난 너를 놓아주어야겠다.
너의 고향 물나라 저 한강 물에.
그토록 어린 나이에 받은 깊은 인상과 감상 때문이었을까. 이때부터 나는 금붕어 철학을 갖고
살아온 것 같다. 어려서 벗들과 놀 때 어떤 친구가 조금이라도 싫다하면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었어도 당장 그만두곤 했다. 이렇게 놓아주는 일로 인해 잃어버린 기회가 아주 많았다. 청년 시절에는 놓쳐버린 아가씨들이 부지기수였다. 흔히들 여자가 노No 하면 메이비Maybe로, 메이비하면 예스Yes로, 새겨들으라지만 나는 고지식하게 상대방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낭패만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것 이상으로 진실할 수 없다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좋아할 수는 없다. 저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삶이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세상에 그 어떤 기쁨도 참된 인간관계 밖에서는 맛볼 가망조차 없으리라. 어렸을 때 읽은 동화가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벌이 나비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비는 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꽃밭으로 아름다운 꽃들만 찾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밤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이 나비로 보여 벌은 하늘로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그리움에 사무친 벌의 숨이 차다 못해 달무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