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치, 운명처럼 인생이 떠돌이가 된다면 행복할까. 그 행복이 낭만일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걸핏하면 떠돌이가 되어 걸림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유목민의 피가 우리에게 있는 건 당연하지만 인생이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이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 팔자라면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형벌이다.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저녁이 행복이고, 아침에 깨어나 기지개를 켤 수 있는 침대가 있는 삶이 행복이라는 너무 당연해서 모르고 산다.
우리는 떠돌이를 방랑자 혹은 거지라고 하고 서양에서는 집시라고 한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둘 다 고단하고 슬픈 인생이다. 한 곳에 얽매임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동경하지만, 자유는 내가 가진 자본만큼 누릴 때 진정한 자유를 말할 수 있다. 물론 특별한 예도 있다. 철학자나 예술가, 종교가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부단한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그들이 찾은 자유는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 대가 없이 나누어 준 진정한 진리로 우리는 평가한다. 힘없고 돈 없고 불쌍한 사람들은 오늘도 자유라는 신발을 신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돈다.
우리도 때론 경계에 서 있을 때가 있다. 언어의 경계, 공동체의 경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방황하기도 한다. 그 경계를 이야기하는 영화 ‘미치광이 이방인’을 보고 나면 제목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를 껴안고 세계를 바라봐야 할 것같다. 미친 것은 세상일까.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나’일까. 영화는 관객인 ‘나’를 이 이방인과 동행하도록 만든다.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덕의 태도다. 규칙적이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서로 어긋나는 묘한 울림이 영화 전체에 흐른다. 참 희귀한 영화다. 묘한 마력이 깔려 있다. 이 영화는 집시에 의한 집시의 영화다. 집시 출신의 감독인 토니 갓리프가 만들고 출연자들도 대부분 실제 집시였다고 한다. ‘미치광이 이방인’ 속으로 들어가 보자.
프랑스 남자 스테판은 루마니아를 떠돌고 있었다. 스테판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랑했던 노래의 주인공 노라 루카를 찾아서 로마니마을를 찾아간다. 시골길을 끝도 없이 걷던 스테판의 신발이 구멍이 나고서야 로마니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에 폭설이 내려 눈 속에서 헤매다가 술에 취한 노인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스테판은 아버지가 듣던 녹음테이프를 노인에게 들려주게 되고 노인은 자신이 노라 루카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스테판은 그 노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서 노인 침대에 누워 잔다.
아침이 되자 외부인들에게 적개심이 강한 마을 사람들은 스테판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도둑놈 취급을 하자 스테판은 마을을 떠다가 어젯밤에 만나 자신의 침대에서 재워주었던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노인은 스테판을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로마니마을에서 노라 루카를 찾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준다. 마을 사람들은 벨기에 말을 할 줄 아는 이혼한 젊은 무용수 여인에게 통역을 하라고 하지만 여인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떠난 망나니 남편의 기억 때문에 통역하지 않겠다고 난리를 치지만 이내 스테판과 친하게 된다.
스테판은 로마니마을에서 사람들과 격이 없이 어울리며 친해지던 어느 날 파리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와 돈을 받게 된다. 그 돈으로 중고차를 사서 여인과 노라 루카를 찾아 루마니아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게 된다. 그렇게 방랑을 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스테판은 노라 루카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방법을 바꿔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집시들의 노래를 직접 녹음하기로 한다. 그러면서 로마니마을 사람들의 삶에 동참하면서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갖게 된다.
“노라 루카는 왜 찾아요?”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였어요. 병석에서 줄곧 이 노래를 들으셨어요”
스테판은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감옥에서 돌아온 노인의 아들이 사고를 치게 되자 로마니마을은 쑥대밭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로마니마을로 돌아온 스테판은 그동안 녹음했던 것들을 노인의 무덤 앞에 갈기갈기 찢어 무덤에 묻는다. 그리고 노인이 아들 무덤에서 집시의 춤을 추었던 것처럼 스테판도 노인의 무덤 앞에서 집시의 슬픈 춤을 춘다.
지금도 집시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유와 바꾼 인권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삶에는 정답이 없지만 인권은 정답이 있다. ‘미치광이 이방인’은 관객에게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숨을 고르고 시선을 옮길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며 반복되는 시선과 어긋난 리듬으로 관객의 마음에 잔잔한 불안을 심는다. 공동체에서 이방인은 외부에 대한 불안이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이면서도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천대받는 사람들, 그 천대를 음악으로 견디고 춤으로 승화시키며 존재하는 사람들의 서사는 슬픔이지만 생명에 대한 찬사다.
로마니들의 노래에 담긴 정서를 이 영화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에게도 잡초처럼 살아야 했던 각설이들이 있었지만, 선진국이라고 생각한 유럽 곳곳에도 아직도 집시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인권유린을 당하며 살고 있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잔인하고 높은 벽이다. 그래도 아름다운 건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이고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사랑 때문이다. 영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기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이방인인가!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