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력하면 결국 이룰 수 있고, 마음을 다하면 어떤 관계든 통할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해왔다. 도를 따르고 흐름을 따르면 각자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정해진다는 노자의 무위자연에 관심이 많아 교육관으로 연결하기 일쑤였다.
“안 될 것 같아도 결국은 다 돼. 한번 믿고 해봐.”
“나는 너를 믿는데, 정작 너를 믿지 못하는 건 너잖아.”
그 말에는 확신이 담긴 격려가 있었다. 집중하는 힘은 사람을 바꾸고 환경을 움직이며 결국 더 나은 자리로 이끈다는 교육적 믿음은 학생들에게 곧잘 알 수 없는 파워를 갖게 했다.
그러나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 가운데 그 믿음에 정반대로 반응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특히 성적은 상위권이지만 유독 조용한 아이들도 스스로를 먼저 낮추며 “저는 안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음에도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왜 그렇게 방어해? 너를 도와주려는 거야.”
그렇게 설득하려고 해도 아이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한발 물러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답답함을 느껴 다그치기도 했다.
그 아이들과의 거리는 늘 일정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관계의 거리를 철저히 관리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른인 내가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훈련되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성숙한 감정 조절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에 과도하게 예민해진 상태, 즉 자기민감성이 만들어낸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문제없는 관계가 유지되었다. 더 이상 기대하지도, 마음을 내어주지도 않는 안정된 거리, 조금만 더 자신을 드러내면 다른 단계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문턱에서 아이는 늘 침묵을 선택했다. ‘왜 이 아이들은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숨기며 방어하는 걸까.’ 하지만 반 전체를 거느리는 입장에서 안위를 명목으로 적당히 무시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다 나중에 부모 상담을 통해 그중 한 학생의 침묵 구조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인정받기 위해 늘 ‘좋은 아이’로 살아왔다. 말썽을 부리지 않았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부모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단련하고 조절했다. 무엇을 잘했는지보다 부모의 시선이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가 점점 더 중요해졌다.
그러나 아이가 셋인 부모는 늘 바빴고, 아픈 동생을 돌보느라 아이가 보내는 관심의 신호는 번번이 무시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더 조심스러워 눈치를 보았는데 오히려 그런 태도가 부모에게는 자신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더 다그침을 받았다.
수년간 반복이 축적된 경험 속에서 아이는 자신 안으로 숨는 법을 먼저 배웠다. 결국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옷 하나, 운동화 하나조차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학생이 되었고, 무엇이 맞고 틀린 것인지, 의견을 말하는 법을 잃어버릴 만큼 자존감은 무너져 있었다.
아이의 조용함은 무기력함이 아니다. 관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태도인 셈이다. 바라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는다는 인과관계를 알아챈 것이다. 자기침묵은 그렇게 아이의 일상이 되어갔다.
자기개념이 명확하지 않을수록 아이들은 타인의 반응에 더 크게 흔들린다. 작은 표정 변화에도 거절을 느끼고, 사소한 침묵에도 관계의 위기를 상상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개념이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는지에 대한 내적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와 특성을 판단하는 인지적 틀을 의미한다. 이 기준이 약할수록 내적 틀의 동요로 아이는 타인의 평가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제야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말, 될 일은 그냥 된다는 말, 도를 따르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무위자연의 사상은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철학이지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진리는 아니었다.
될 일은 언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기다려주는 시간과 공간이 공존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도를 따른다는 것은 아이를 밀어붙이는 일이 아니라 그 아이와 삶의 균형을 맞춰 가는 과정. ‘조화’와 ‘조절’일지도 모른다.
몇 년 후, 대학생이 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예전의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눈부셔서 조용했던 교실 속 시절이 잘 겹치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아주 작은 관계의 변화 하나만으로 가장 불행해지기도, 가장 행복해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조금 더 바라봐 주고, 조금 덜 다그치고, 조금 더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삶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배웠다.
앞으로 더 많은 청소년들이 거절을 먼저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성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침묵이 아니라 자기 말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타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으며 자연스러움을 오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장착되기를 조용히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