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의 승무원 편성

윤헌식

판옥선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끈 주역이다. 최근 임진왜란 관련 영화나 TV 드라마 등이 인기를 끌면서 많은 분이 판옥선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판옥선에 관한 정보도 인터넷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판옥선은 조선시대 16세기에 제작된 전투 선박이다. 삼포왜란(1510년), 사량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 등이 일어났을 때 기존 주력 전투선인 맹선(猛船)이 전투력의 한계를 드러내자, 조선 조정이 고려 시기의 함선을 참고하여 새로이 만든 전투선이 바로 판옥선이다.

판옥선을 가리키는 조선시대 공식 명칭은 '전선(戰船)'이다. 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역사를 기록한 읍지(邑誌) 또는 관아 사이에 오간 공문 등에서 '전선'이 판옥선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장계에서도 '전선'이 판옥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사례가 여럿 발견된다. 단, 조선시대에는 ‘전선'이 '전투에 사용되는 선박'을 총칭하는 용어로도 쓰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전선'은 그 의미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각선도본』에 수록된 판옥선 그림 - 자료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판옥선에 탑승하는 승무원의 편성을 학술적으로 다룬 초기 연구 자료는 고 김재근 교수의 『속한국선박사연구』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 시기 지휘관급이 탑승한 대형 판옥선의 탑승 인원을 160명으로 추산하고, 일반 판옥선의 탑승 인원을 125~130명으로 추산하였다. 이후 2013년에 이르러 아래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아마 이 논문이 판옥선 승무원 편성을 주제로 한 최초의 연구 자료일 것이다.

김병륜, 「판옥선의 승조원 편성에 대한 연구」, 『이순신연구논총』 20, 2013,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위 논문은, 본래 웹사이트 블로그로 올렸던 내용을 나중에 수정 및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판옥선 승무원 편성은 필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주제였기 때문에, 처음에 해당 블로그를 인터넷에서 발견했을 때 그 내용을 스크랩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그 블로그가 논문으로 나왔을 때는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좋은 자료가 블로그로 머물지 않고 논문으로 업그레이드되어 많은 사람에게 학술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훌륭한 자료가 있음에도 필자가 굳이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의 승무원 편성'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여야 할 것 같다. 「판옥선의 승조원 편성에 대한 연구」는 비단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판옥선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규모가 커지면서 승조원 편성도 변환한다. 이 논문은 이러한 변화까지 자세히 다루어 그 분량이 49페이지에 달하므로 역사 전공자가 아닌 분들에게는 정독하기가 조금 부담스럽다. 이러한 까닭으로 필자는 해당 논문을 참조하여 ’임진왜란‘ 시기로 기간적 범위를 좁혀 ’판옥선 승무원 편성'을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혹시 이 주제를 깊이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위 논문을 참조하시기를 권장해드린다.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 승무원 편성은 여러 문헌에 산발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다음의 2가지 자료가 주요하다.

『임진장초』, 「청반한일족물침지명장(請反汗一族勿侵之命狀)」(1592년 12월 10일)

1척의 전선(戰船)에 사부와 격군(射格: 射夫·格軍) 도합 130여 명이 탑승합니다.

『사대문궤(事大文軌)』 권28, 만력26년(1598년) 8월 7일

1척의 배에 전투병(戰兵)은 30명 또는 40명, 격군(格軍水手)은 100여 명이 탑승합니다.

「청반한일족물침지명장」은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시기 조정에 보낸 장계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당시 현직 수군 지휘관인 전라좌수사 직책에 있던 충무공이 조정에 보낸 장계이므로 그 내용은 국가 공식 자료로서 상당한 신빙성을 갖는다. 이 기록에 언급된 사부(射夫)는 활을 쏘는 군사를 말하며, 격군(格軍)은 노를 젓는 인원을 가리킨다. 비록 여기에 함포를 쏘는 인원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판옥선에 함포를 담당하는 인원이 없을 수 없으므로 함포를 쏘는 인원이 사부 숫자에 포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대문궤』는 조선 조정이 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를 모은 자료이다. 여기에는 판옥선 전투병이 30~40명, 격군이 1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외교 문서는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실과 조금 차이가 있는 내용이 실리기도 하지만, 위 기록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정확한 사실이 실린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위 기록이 작성된 1598년 8월은 조선 수군과 명 수군이 연합하여 군사 활동을 하던 시기이므로 명 군부가 조선 수군의 판옥선 승무원 규모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 두 기록을 종합하면,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 승무원은 대략 전투병 30~40명, 격군 100여 명으로 편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격군 규모는 또 다른 여러 기록을 통해 그 규모가 명확히 확정된다. 다음은 그러한 기록이다.

『선조실록』 권88, 선조30년(1597년) 5월 13일 계묘 4번째 기사

삼도(三道)의 전선(戰船) 중에 현재 진중(한산도)에 있는 배가 134척이고, 격군이 13,200여 명입니다.

『선조실록』 권157, 선조35년(1602년) 12월 29일 병진 2번째 기사

80척의 배에 1번(番)에 들어가는 격군(格軍)의 수는 8,000명입니다.

『선조실록』 권188, 선조38년(1605년) 6월 7일 경술 2번째 기사

전선(戰船) 1척의 격군(格軍) 100명이므로

위 3가지 『선조실록』 기사 가운데 1602년과 1605년 기사는 비록 임진왜란 이후 기록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이므로 판옥선 승무원 편성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 3가지 기록에 나타난 판옥선 1척당 격군 숫자는 약 100명이다.

위에서 살펴본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나 『선조실록』에는 판옥선 승무원 편성이 비교적 간략히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편성은 조금 더 세분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에 기록된 전사자나 부상자 명단을 살펴보면 사부나 격군 이외에도 사공(沙工), 무상(無上), 방포장(放砲匠) 등과 같은 직책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 승무원 편성을 더욱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있을까? 임진왜란 직후인 1615년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심열(沈悅, 1569~1646년)이 조정에 보낸 서장(書狀)에 판옥선 승무원 편성을 설명한 내용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그 상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이 기록 또한 임진왜란 이후 기록이지만, 전쟁이 끝난 뒤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심열의 문집 『남파상국집』에 실린 해당 기록이다.

『남파상국집』 권5, 「경상감사시서장」(1615년)

한 배(판옥선)의 격군(格軍)은 반드시 90여 명은 되어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은 단지 80명을 채우는데 정수(碇手), 타수(舵手), 요수(繚手), 사공(沙工), 무상(舞上) 등이 모두 이 숫자(80명) 안에서 뽑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격군의 숫자가 매우 부족하여 풍파를 만나기라도 하면 배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중략>> 각 배의 사부(射夫)는 모두 출신(出身), 군공(軍功), 신선(新選定別甲) 등에서 뽑아 보내는데, 그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한 배에 정해진 군사가 가까스로 15명에 이르며, 그 15명의 군사가 (배에서) 좌우로 나누어 섭니다.

위 기록은 판옥선 격군의 숫자가 반드시 90여 명은 되어야 한다고 서술하였는데, 이 규모는 앞에서 살펴본 임진왜란 시기 격군 규모 약 100명과 거의 일치한다. 위 기록에 언급된 정수는 닻을 관리하는 요원이며, 타수는 키를 관리하며, 요수는 돛을 관리하고, 무상은 전방을 주시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사공은 관련 문헌에 따라 해당 기록이 조금씩 달라서, 그 임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어떤 문헌은 사공을 정수, 타수, 요수, 무상을 합쳐서 부르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무상의 임무는 논문 「판옥선의 승조원 편성에 대한 연구」에 잘 설명되어 있다.

1642년 『승정원일기』(인조 20년 3월 5일)는 '전선(판옥선)의 노(櫓)는 좌우를 합쳐 20착(捉)으로서 노 1착에 각 4명이 붙고, 사공과 무상이 각각 1명으로서 82명으로 정해져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에 적용하면, 격군 100명 가운데 80명이 순수하게 노를 젓는 인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머지 20명 가운데에서 배를 운용하는 요원인 정수, 타수, 요수, 사공, 무상을 뽑았을 것이다. 1704년에 작성된 「양남수군변통절목」은 '전선(판옥선) 1척에 노군이 100명이고 예비병력이 20명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순수하게 노를 젓는 인원이 80명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양남수군변통절목」은 수군 역제(役制)의 개편과 운영을 규정한 법제서이다.

「양남수군변통절목」은 배를 운용하는 요원인 선직(임무 미상), 정수, 타수, 요수, 무상을 각각 2명으로 규정하였는데, 이를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보다 임진왜란 시기에 가까운 기록인 1642년 『승정원일기』가 사공과 무상의 숫자를 각각 1명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양남수군변통절목」과 『승정원일기』의 차이를 고려하면,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 1척에 배당된 정수, 타수, 요수, 사공, 무상은 각각 1~2명으로 생각된다.

『남파상국집』은 사부의 규모를 15명에 이른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시기에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남파상국집』은 화포를 담당하는 방포장의 인원은 기록하지 않았다. 「양남수군변통절목」은 화포를 담당하는 화포장(火砲匠)의 숫자를 판옥선 크기에 따라 다르게 기록하였는데, 그 숫자는 10~14명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임진왜란 시기 방포장의 숫자는 10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하면,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 승무원 편제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선박 운용 인원(100명)

격군: 80명

정수, 타수, 요수, 사공, 무상: 각 1~2명(총 5~10명)

예비인원: 10~15명

2. 전투 인원(30~40명)

사부: 15명 이상

방포장: 10명 내외

조선 후기 자료에는 판옥선 전투 인원으로 사수(射手-사부), 화포장(火砲匠), 포수(砲手) 등이 기록되어 있다. 논문 「판옥선의 승조원 편성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화포장은 화약 무기 전문기술자이면서 화약 무기를 직접 운용하기도 하는 인원이고, 포수는 화약 무기 운용 인원이다. 충무공의 장계를 살펴보면 방포장(放砲匠)이라는 직책이 몇 차례 나타나고, 화포장과 포수라는 직책은 보이지 않는다. 방포장이 화포장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화포장과 포수를 함께 말하는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참고자료]

김재근, 『속한국선박사연구』, 1994, 서울대학교출판부

김병륜, 「판옥선의 승조원 편성에 대한 연구」, 『이순신연구논총』 20, 2013,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조성도 역, 『임진장초』, 2010, 연경문화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판옥선 학술 복원 보고서』, 2022,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한국고전종합DB, 심열(沈悅),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 권5, 「경상감사시서장(慶尙監司時書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6.03.06 10:46 수정 2026.03.0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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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