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키르키즈스탄 탈라스는 고선지장군의 전적지다.
고선지장군이 AD751년 이곳 탈라스강 하반에서 당나라 군사와 현지 부족군사 등을 규합한 4만여 명을 이끌고 압바스조 페르시아 대군 5만여 명과 싸운 곳이다.
이곳 현지에는 전설도 많아 다들 전투의 현장이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다 맞는 말이다. 양측 10만 대군의 전투 현장이 어디 링을 정해 놓고 싸웠겠는가? 전투 후반에 가서는 산발적인 추격전이 되었을 것이니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이 싸움이 병력의 다수로 승패가 결정되어진 것이 아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강유의 재주를 칭찬하며 말했다.
병부재다(兵不在多) 병력이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고
인지조견(人之調遣) 사람이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렸다
그러니 양측의 전력은 비슷하다고 보아야 한다. 1만 명이 더 많다고 페르시아군이 이긴 것이 결코 아니고 패인이 따로 있었다. 고선지장군이 실크로드 천산 남로의 많은 부족 국가를 거쳐 오면서 전략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의 작은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중국이 오면 중국에 협조하고, 페르시아가 오면 페르시아에 협조하고, 서하가 오면 서하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안중에 중국이나 페르시아나 서하가 그게 그것이고 자신들의 생존만이 중요했을 것이다.
재차 중국군을 이끌고 진군한 고선지장군에게 천산 남로 소국의 지배자들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섰다. 문제가 여기에 있다. 구당서에는 고선지장군이 이들을 배반자라 하여 무자비하게 처단했다고 한다. 그랬으니 인심이 그를 따를 리 만무하다.
이런 현지 부족민의 군사를 고선지 장군은 강제로 고선지의 중국군에 편입시켰다. 이들은 당연히 양측의 전력을 저울질하여 미리 자신들의 진로를 결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막상 중국군과 페르시아군이 탈라스강의 하반에서 접전을 시작하자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더구나 전투의 현장은 탈라스강이 북류하는 지점으로 개활지다. 중국군이 잘하는 매복과 기습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곳이니 고선지 장군의 패배는 미리 예정되어진 것이다.
삼국지에는 남만을 정벌하러 떠나는 제갈량에게 마속이 현지인의 마을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권한 말이 있다.
공심위상(攻心爲上)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공성위하(攻城爲下)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심전위상(心戰爲上)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병전위하(兵戰爲下) 병장기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고선지 장군은 졌으나 이 싸움의 영향은 인류의 역사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바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문화 전쟁이었던 것이다.
사마르칸트에 거주하던 중국인 제지 기술자가 페르시아로 가서 페르시아의 종이가 탄생한다. 시간이 흘러 서양 전역에 전해진 제지 기술은 지식을 대중화시킨다. 그 결과는 마침내 잠든 중세 유럽을 깨워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 문명이 청나라를 강타하니 운명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