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길은 인생의 은유다. 그저 걷는 것 말고 무엇이 필요한가. 길 위의 길도 있고 길 아래 길도 있고, 길 속의 길도 있다. 그러니까 길은 인생이고 사랑이고 삶이다. 길을 빼놓고 철학을 논할 수 있을까. 문학을 논할 수 있을까. 삶을 논할 수 있을까. 길을 가는 나그네의 등을 밀어주는 건 바람이다. 바람은 길의 동무다. 그러니 길은 예술의 메카이다. 먹먹하고 섭섭하고 아련한 영화 ‘바람의 여행’은 이질적이면서 친근하다. 로드무비 ‘바람의 여행’을 보는 내내 마음속에는 찬 바람이 불다가 햇살이 내리다가 비가 내렸다.
낯선 콜롬비아의 광활한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흑백영화처럼 움직임이 활기차지 않다. 처음엔 표정 없는 얼굴과 단순한 살림살이 그리고 침묵으로 덮인 사람들의 시간이 생경하다 못해 눈에 익지 않아 감정이입이 잘되지 않았다. 그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음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풍경에 압도당한다. 대책 없이 단순하고 이유 없이 끌리는 풍경이 이미 마음속에 집을 짓고 있을 무렵 사람들의 마음까지 다 읽어낼 수 있었다.
길은 장엄하다. 아니다. 잔혹하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습기 없는 바람과 까무잡잡한 얼굴의 사람들이 콜롬비아를 거쳐 카리브해 연안을 스치고 안데스산맥으로 이어진다. 때론 침묵으로 때론 거친 숨결로 때론 자연의 소리 속으로 거칠게 인간의 감정을 막 밀어 넣는다. 그 감정이 몹시 불편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몰입되고 만다. 늙은 아코디언 연주자가 소년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숨긴 감정의 골을 따라 가게 된다. 그 영화가 ‘바람의 여행’이다. 바람의 여행 속으로 들어가 보자.
콜롬비아 북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 늙고 보잘것없는 아코디언 연주자 이그나시오는 아내가 죽은 후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한때 빛나는 명성도 얻었지만, 이제는 음악을 버리려고 마음먹는다. 그는 자기 아코디언이 악마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게 된다. 부활절을 앞둔 사순절이 시작되자 그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아코디언을 둘러매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길을 떠난다.
소년 페르민은 이그나시오를 따라간다. 그러다가 시장이 주최하는 파티에 전설적인 아코디언 연주자인 이그나시오를 초대하지만 거절하고 길을 떠난다. 소년은 자신의 아버지가 이그나시오처럼 떠돌이 음유시인이었다며 자신도 이그나시오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던 이그나시오는 소년 페르민을 향해 말한다.
“축제 따라 떠돌고 여자 따라 떠돌다 내가 낳았는지도 모르는 아이도 있지”
두 사람은 바예나토 경연이 열리는 베세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아코디언 연주 경연을 펼치다가 상대편 연주자가 이그나시오의 아코디언을 찢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을 어찌어찌 마무리 하고 자신의 형제를 찾아가 아코디언을 고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드디어 아코디언의 원래 주인이며 자신의 스승이 있는 타로아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은 이미 몇 년 전에 죽었고 시체를 치우지 않은 채 그대로 관속에 넣어 두고 있었다. 스승의 아내가 말한다.
“몇 년이 걸려도 제자가 올 때까지 자신을 땅에 묻지 말라고 하셨어요”
“스승님 제가 이 아코디언을 가져왔어요”
이그나시오는 스승의 시신과 스승의 아이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그 모습을 다 지켜본 소년 페르민은 그곳을 떠난다. 떠나는 소년 페르민의 어깨에 아코디언이 있었다.
‘바람의 여행’은 마치 다큐같이 투박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실제 콜롬비아의 전통 음악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이다가도 흑백영화처럼 고독이 묻어나는 거친 화면을 보고 있으면 촌스럽기도 하다. 그 촌스러움은 숨결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영혼이 깃든 것처럼 깊은 울림이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안다. 이그나시오가 떠나는 이유는 구원을 위해서 아니다. 그는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끝내고 싶어서였다. 고단하고 힘들고 늙은 삶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어딘가에서 불쑥 올라오는 젊은 날의 명예에 집착하게 되고 그 집착은 욕망이라는 허구를 불러오곤 한다.
콜롬비아의 속살을 보는 즐거움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황량한 지평선, 아름다운 카리브해, 푸른 산맥의 안데스를 보며 인간은 자연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 소년 페르민의 잘생기지 않은 얼굴도 자연처럼 자연스러워서 좋다. 과하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도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소년 페르민처럼 젊음은 자꾸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늙음은 이그나시오처럼 자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 둘의 사이에는 침묵이 있고 용기가 있고 사랑이 있다.
아코디언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하나의 줄이다. 공동체의 언어이며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교착점이다. 스승과 제자는 가르침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이어진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듯이 길은 걷기 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바람의 여행’ 같은 영화를 만나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다시 뜨거워진다. 참 좋은 영화다. 고장난 아코디언을 고쳐준 이그나시오의 형이 말한다.
“다른 악기들은 화음이나 베이스를 붙일 수 있지만 아코디언만은 혼자서 다 해내지”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